[순원의 글씨에세이] 마늘 까러 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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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원의 글씨에세이] 마늘 까러 오셔요
  • 서예가 순원 윤영미
  • 승인 2020.06.23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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忙中閑(바쁜중에 한가한 틈). 20×15. 2020.
忙中閑(바쁜중에 한가한 틈). 20×15. 2020.

“머리가 복잡할 때요? 그냥 단순한 노동을 즐겨 해요! 수도 놓고 바느질도 하고 아참! 콩나물 대가리 떼기나 마늘도 까고 싶어요. 두 손이 막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져 버려요. 그럴 때가 있잖아요. 그냥 멍하니 TV를 보면서도 딴생각이 나고 심심해져요. 그래서 저는 두 감각이 동시에 움직여야 딴생각이 사라져 버려요. 가령 라디오를 들으면서 설거지를 한다든지, 영화를 보면서 종이접기를 하든지요. 한때는 음악을 틀어놓고 한없이 찻잎만 덖었던 적도 있던걸요. 그러면 가장 무념무상이 돼요.”

남해 사는 남자가 커다란 마늘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어디서건 입버릇처럼 마늘을 까고 싶다고는 했지만 눈앞에 놓인 마늘은 어린아이 하나 크기만큼 많다. 한동안 놀 거리가 생겼구나 하는 마음과 저걸 다 까서 뭐 하지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망중한에 즐길 수 있는 장난감이 생겼다는 마음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들켜 버렸다. 

세상이 고요해지는 시간, 겉껍질을 분리하고 마늘쪽을 나누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을 맞추었다. 한동안 듣지 못한 저음의 남자배우 목소리가 흐른다. 이 공간에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친근한 남자의 목소리가 있었고, 마늘을 보며 부자가 된 여자가 있었다. 미련스러운 고독이 사라져 버렸다. 제법 토실한 하얀 속살이 드러나고 알맹이가 쌓이고 마늘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차 자리에서 요즘 뭐 하냐고 물으면 나는 마늘을 까고 있다고 했다. 의아해 다시 물어본다. 생각을 정리할 게 많을 때는 마늘 까기가 최고라고 했다. 속뜻을 알아차린 눈치 빠른 사람은 밭에 풀을 뽑으러 오라고도 그러고 매실을 따러 오라고도 그런다. 

마늘을 까고 있는 소문이 퍼졌나 보다. “요즘 생각을 까고 계시다던데... 그 생각을 제가 조금 더 보태 드리고 싶습니다. 깐 마늘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렇다. 나는 마늘을 까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까고 있는 중이었다. 저 마늘 속살이 다 드러나면 나는 분명 무언가에 또다시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다짐이 산을 이루고 생각이 강물이 되어 흐르는 밤이다.  

“지금 어디 있어요?” “작업실에요, 마늘 까러 오셔요” 

“오늘 뭐 하셔요?” “바빠요, 마늘 까러 오셔요” 

“밥 먹으러 가야지요?” “배고프지 않아요. 마늘 까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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