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텃밭 가꾸는 일을 만들었다. 

말을 듣는 순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흘려들었다. 수업도 전전긍긍인데 딴 데 정신을 둘 깜냥이 못 될뿐더러, 교무부장이 선생님들께는 부담을 주지 않겠다 누누이 장담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얌통머리도 없이 일부러 교무실에 와서는 모종을 심을 거란다. 귀 딱 닫고 앉아 있으려니 다른 담임 선생님들이 우루루 일어선다. 물색없이 앉아 있다가는 학년부장씩이나 되어 어쩌고저쩌고 딱 욕먹기 좋은 상황이다.

반별로 뭐 몇 개, 뭐 몇 개 모종이 주어지고, 밭 위치도 정해서 보여준다. 부담 갖지 말라더니. ‘죽든지 말든지 내는 모른다. 알아서들 하라지’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한번 제대로 대거리하지 못했다. 쉰을 넘기면서 이제는 눈총받는 것이 피곤한 까닭이다.

주변에서 탁자 두 개 붙인 듯한 밭뙈기 얻어 작물을 심어 놓고는 한참 재미 붙여 신난 이들에게 격려보다는, “6월에 비 오면서 연방 풀들 자라날 때도 재밌을까? 풀 뽑다가 모기한테 헌혈 제대로 해야 할 걸?” 하면서 이죽거렸더랬다.

점심때마다, 차마 그 어린 것들을 죽일 수 없어 물을 주러 가면서도 여전히 인상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면 나는 죽다 깨어나도 흙이니 생명이니 하는 거룩한 말들은 나랑 연이 먼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후문으로 출근하는데 학교 울타리를 따라 핀 장미 덩굴 근처에 뭔가 얼른거리는 것이 있다. 젊었을 적에 영감 대접했던 지금의 내 나이보다 몇 살 더 많은 축이다. 가끔 덩굴 안쪽으로 손이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한다. 가만 보니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텃밭에 물주던 점심 무렵에도 저 영감이 장미 덩굴 근처를 알짱거렸고 퇴근 무렵에도 그랬던 것 같다. 

장미 덩굴이 제법 그럴듯하게 꽃을 피웠던 게 장미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제는 정년을 한 손으로 짚을 수 있는 저 선배께서 바지런을 떨며 보살핀 까닭이었다. 작년에 장미가 제법 어여쁜 자태와 맵시를 뽐내며 피었던 것도 저 양반 손길 때문이리. 

텃밭을 오가는 쓰잘데기없고 짜증만 치솟는 짓을 하며 알았다. 장미가 장미일 수 있었던 것이 제가 잘나서만 그랬던 것이 아님을. 

예전에 거창의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글쓰기 활동에서 ‘들에는 이름 없는 풀이 지천으로 피었다’고 한 아이가 쓴 글에 “야 이 녀석아, 이름 없는 풀이 어디 있느냐. 네가 이름을 모른다고 그 풀이 어찌 이름이 없을 수 있느냐”하고 혼내켰다는.

그래. 우리가 이름을 모를 뿐, 풀들도 저만의 이름과 자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슐러 르귄은 사물의 참된 이름을 알아야 마법을 펼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제대로 이름을 아는 풀꽃이 없다. 우리반 텃밭의 작물도 대충 주워섬기고 있지 자세히는 모른다.

아침마다, 수업 시간마다 출석부를 보고 이름이야 부르고 있지만, 언제 한번 제대로 이름을 불러 아이들의 꽃다운 영혼을 깨우는 기똥찬 마법을 펼쳐낼 수 있을까. 지극정성으로 가꾸어야 저마다의 빛깔을 더욱 눈부시게 피워낼 것인데, 나는 과연 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눈길을 주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주말인데 텃밭에 물을 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가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자꾸 걱정이 된다. 

‘에이 × 괜히 밭은 만들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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