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발간한 지 40년은 더 되었으니 빛이 바래 종이가 누렇습니다. 후각을 끄는 낡고 묵은 냄새도 친근하면서 거칠 게 없습니다. 만지면 책의 결이 부드러워 살아있는 나무를 느끼게 합니다. 민음사에서 오늘의 시인총서란 이름으로 김수영 시선을 펴냈는데 그 제목이 『거대한 뿌리』였지요. 회색 표지의 이 시집은 160쪽 분량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그것은 아쉽게도 155-156, 159-160쪽 두 장이 찢겨서 펴낸 날짜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김수영 시인과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입대하는 날이었습니다. 머리를 천 원 주고 빡빡 밀고는 동래역에서 논산 가는 열차에 올랐습니다. 아침 열 시에 출발한 기차는 역마다 쉬면서 꾸역꾸역 하루해를 넘기더니 그러고도 한참을 더 달렸습니다. 시간은 흘러 다음 날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논산역에 도착했습니다. 기차가 멈추기도 전에 주변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하나같이 손을 내밀며 건빵을 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저에겐 무척 낯선 풍경이었지만 그곳 아이들에겐 이미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습관이었습니다. 

신체검사에서 ‘완’자-군 생활에 지장이 없다는 의미로 이를 받지 못하면 귀향 조치함-를 받은 다음 신병 교육을 받으려 대기할 때였습니다. 누군가 뛰어오더니 하사관 후보생을 차출한다면서 어서 피하라고 외쳤습니다. 조용하던 내무반이 갑자기 소란스러웠습니다. 하사관 후보생으로 뽑혀 가지 않으려면 어디론가 피신해야 했습니다. 마땅히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나는 그만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먼지가 수북한 데다 퀴퀴한 냄새는 마치 지하를 지배하는 저승사자 같았습니다. 숨을 꽉 죽이고는 차출하러 온 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침상 밑에 숨어 있는 그때 손에 뭔가 잡히는 게 있었습니다. 누가 버린 건지, 숨겼다 잊은 건지 시커먼 때를 한껏 뒤집어쓴 얇고 작은 책이었습니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를 품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게 운명적 만남이란 건지요. 훗날 제가 쓴 논문 제목을 ‘김수영 시에 나타난 네 가지 죽음의 의미’라 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지요.  

시집의 속표지 앞쪽에는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고 그림의 목덜미 밑으로 ‘POET SOO YUNG KIM 詩는 나의 닻(錨)이다. Y, Killl 56’이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첫 작품 「공자의 생활난」부터 마지막 「풀」에 이르기까지 모두 65편의 시가 담겨 있었지요.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때부터 시집 『거대한 뿌리』와 친해져 나아가 시인 김수영 알기의 열병에 사로잡혔지요. 

시 「거대한 뿌리」에서 만난 싯구입니다.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이런 구절과 맞닥뜨리면서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나게 컸습니다. 얼마나 많은 상념들이 몸과 마음을 휘저었는지 한동안 혼수상태 못지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인의 이러한 시적 몸부림을 문학평론가 김현은 뭉뚱그려 한마디로 ‘자유의 절규’라고 정의했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시 「풀」을 쓴 지 보름 뒤 귀가하다가 버스에 치여 세상을 떠납니다. 아직 못다 이른 자유를 산 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그렇게 그는 훌쩍 가고 말았습니다. 2022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저는 거대한 뿌리는 되지 못할지언정 거대한 뿌리를 닮으려는 몸부림은 쳐야겠다 속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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