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삼조 시인.
정삼조 시인.

며칠 전 한 생활한방약초 강좌의 첫 시간에 강사 선생님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 아시느냐는 질문을 주셨다. 물론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제목이라는 말씀을 곁들이면서. 당연히 톨스토이가 강조하고자 한 해답은 ‘사랑’이겠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우선 나부터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강사 선생님은 생활한방 선생님답게 ‘건강’이라는 답을 선뜻 제시하신다. 맞는 말씀이다. 건강이 없으면 건강한 정신도 없고 아울러 정상적인 삶 자체도 없기 때문이겠다. 

결국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은 가치의 최고로 두는 것이 미세한 것일지라도 다 다를 것이기에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최고의 가치가 그 사람의 가치관이 될 것이다. 그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겠고 그 다른 것을 가지고 그것이 남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는 것이 아닌 이상 탓할 수는 당연히 없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렇더라도 그 가치관이 이 사회의 안녕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 것이었으면 하는 소망쯤은 대체로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근래에 이 지구촌을 큰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코로나19 감염병도 우리의 가치관 변화에 긍정적으로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감염병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 터득하고 있다.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이 병을 물리칠 수 있고, 그러기에 세상은 더불어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마음에 새겼을 줄 안다.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기 나라만 온전하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니다. 전 세계는 이미 한 생활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웃 나라의 불행이 언제 우리를 덮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왕래도 없고 무역도 없으면 역사의 시계는 얼마나 거꾸로 돌지 모른다. 세계의 혼돈을 막고자 전 세계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이니 나라 안팎의 다툼이 좋게 들릴 리 없다. 미국과 중국은 왜 다투는가 싶기도 하고 남북문제나 한일 관계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한다. 과거사 문제와 맞물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회견으로 촉발된 사태도 답답한 일이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본질적 해결이라는 본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방향에서 시시비비가 이성적으로 가려졌으면 좋겠다. 

오천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다 보니 사건과 사고가 끊임이 없다. 외적으로는 이백여 나라가 경쟁하는 국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바른 역할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 쉽게 해결될 일이 없다. 이런 때일수록 필요한 말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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