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짜장면’하면 떠오르는 낱말이 있습니다. 생일, 입학, 졸업, 소풍, 이사. 이들의 공통점은 학창 시절 제가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는 점이지요.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음식이지만, 1970년 전후만 해도 짜장면은 늘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먹게 되면 면발을 다 해치우는 건 물론, 그릇을 들고 코를 처박고는 혀를 내밀어 여기저기에 묻은 춘장을 남김없이 쪼옥쪽 핥았습니다. 그릇이 깔끔하게 하얘질 때까지 말이지요. 어느 종속된 사랑이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값이 50~60원 정도였습니다. 입석 버스비가 6원임을 감안하면 서민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지요. 짜장면을 시키면 반찬으로 다마네기와 다꽝이 나왔습니다. 그중 식초를 뿌린 다꽝 맛은 일품이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비교해 보아도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다만 이들을 우리말로 양파와 단무지라 부르는 것이 바뀌었을 뿐이지요. 

여담 한마디. 다꽝은 고구려 사람 택암澤庵 스님이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중 규슈지방에서 처음 이것을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스님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명명한 것이 곧 다꽝이었던 셈이지요.   

1980년대 초 어느 흐린 날 아침이었습니다. 근무하는 삼천포여자종합고등학교로 한 할머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세파의 험난함을 대변해 주듯, 허리가 많이 굽었으며 얼굴은 거무스름하고 이마엔 굵은 주름이 깊게 팬 분이었습니다. 때가 잔뜩 묻은 종이를 놓칠세라 꼬깃꼬깃 접어 손에 꽉 쥐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리셨습니다.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는 손녀를 대신해 대학 입학 원서를 쓰러 오신 거였습니다.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마음을 끌었습니다. 무작정 정겨움, 거리낌 없는 다정함 뭐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핵교 선상님임니껴?’ ‘선상님요, 요거 할라쿠모 우찌 하모 되능교.’ ‘우리 손주가 시방 핵교, 대핵교 갈라꼬 그으 머 쓰는 게 있다 카데예. 그거 쓸라꼬 왔다 아임니껴.’ 

제가 다 해드릴 테니 걱정 말고 편히 앉아 계시라며, 힘든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를 안심시켰습니다. 물을 한 잔 드리고는 일을 처리했습니다. 할머니가 가져온 구겨진 종이 속에는 도장과 사진이 들어있었고, 연필로 비뚤배뚤 쓴 여자 이름과 대학 학과가 보였습니다. 타지에 있는 손녀의 부탁을 받고 대신 오셨던 것이지요.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연신 잘해 달라는 말씀을 되풀이하시는 할머니. 어른들의 내리사랑이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다 되었으니까 가시면 됩니다.”

“예 예, 고맙심더이, 고맙심더이.”

인사를 하고는 몇 걸음 가시던 할머니, 고개를 수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다가 되돌아와 뭔가를 건넵니다. 

“선상님 글 쓴다꼬 욕 봤지예. 이거 울마 안 되는데 쪼맨데 낭중에 짜장문 사 무이소.”

극구 마다했지만 오히려 당신을 무시한다고 역정을 내시는 바람에 어쩔 도리 없이 받은 오백 원짜리 지폐. 수고한 대가로 받은 촌지였습니다. 짜장면 한 그릇에 400원이었으니 할머니로서는 꽤 큰돈을 쓰셨습니다. 그때 끝내 그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면, 할머니께서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으셨을 겁니다. 볼품없는 늙은이라 당신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할머니께서는 오백 원 지폐를 제 손에 쥐어 주시고는, 몇 번씩이나 뒤돌아 인사를 하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흐린 날 짜장면을 시켜 먹노라면 불현듯 할머니의 잔상이 떠오릅니다. 잘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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