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休). 20×15. 2020.
휴(休). 20×15. 2020.

내려올 때 굳이 차 두 대일 필요가 없다며 버스를 타라는 친구 말에 시외버스터미널로 갔지만 매표소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선거철 정치인에게 지하철 요금을 묻는 질문에 당혹해 하던 장면이 지나간다. 나는 그런 높은 사람이 아닌데 이웃 동네 가는 버스 값을 모른다. 천 원짜리 몇 장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만 원짜리를 꺼내 계산하고 천 원짜리 거스름돈을 잔뜩 받아 들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과 오래된 터미널 특유의 찌든 냄새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버스 앞에 붙여진 도착지를 여러 번 확인하고서야 어색하게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을 보았다. 버스 안에서는 바라보기만큼 내려다보기가 좋았다. 매일 지나다니는 큰길가 모퉁이에 눈여겨보지 못한 작은 안경점이 있었고, 몇 해 전 개업한다고 떠들썩했던 치킨가게 간판이 이젠 제법 세월에 빛이 바래 있었다. 건물 사이 공터의 어지러운 빈틈이 보이고, 거리에서 나뒹굴고 있는 박스 상표까지도 눈에 들어오는 이 풍경이 사람 냄새라는 살가움으로 다가왔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니 참 솔직한 세상이었다. 

도심을 빠져나온 버스는 시골길 이차선 도로를 달렸다. 산 밑에 양지바른 마을이 눈동자에 가득 들어와 버린다. 도로보다 낮은 시골집은 지나가는 버스 창으로 마당을 그대로 내어주고 있었다. 어느 집 앞마당에는 수국이 가득해 주인장의 마음이 분명 예쁠 거라 여겼다. 장미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울타리도 보았다. 마당을 텃밭으로 가득 채워 된장 쌈 가득 먹어낼 인심도 보인다. 툇마루 옆에는 명절 때나 오던 어린 손자의 장난감에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담벼락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어느 길가 오래된 기와집은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주인 잃어 곧 무너질 듯 위태롭다. 길가 풀숲에 숨어있던 작은 도랑이 흐르고 드문드문 피어있는 풀꽃이 한가롭다. 마을 어귀 버스정류장에 긴 나무의자가 쓸쓸했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을 내려갈 때 보았다던 시인의 눈처럼 버스를 타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정겨운 길이 있었다. 마을 뒤 저 높은 산을 올라 남해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었던 기억으로, 지금쯤 산등성이에 피어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다시 사라져 버릴 들꽃을 상상했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았을 뿐인데 세상은 온통 풍경화도 되고 정물화도 되어 버렸다. 

세상은 우물이야. 내가 보았던 세상은 온통 우물 속 세상이었어. 사람들은 뒤에서 내 엉클어진 뒤통수를 쳐다보기도 하고, 위에서 내 빈 정수리를 내려다보기도 해. 눈만 가리고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 안에는 개똥철학자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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