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이 산다.  20×15. 2020
아무 일 없이 산다. 20×15. 2020

나는 이 고요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산더미처럼 옆에 쌓아 고요가 도망가지 못하게 더 누르고 있었고, 미뤘던 일들을 메모지에 써 내려가며 고요를 더 늘여 보고도 싶었다. 다양한 크기의 낙관도장 새기기, 종이 주문 넣기, 족자작품 구상하기... 몇 개를 적어 내려가다 더 사소하게 들어가 보기로 한다. 접시 닦기, 차(茶) 단지에 나눠 담기, 쌓아놓은 옷 걸기, 바닥 얼룩 지우기, 노트북 사진 정리하기, 커피콩도 사러 나가야겠지. 이 소소한 일상들이 내 고요를 연장 시키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그날은 저녁노을이 참 붉었다. 고즈넉한 평화로운 풍경에 저녁식사로 깔끔한 초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마을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좁은 길을 벗어나 좌회전을 하려는 순간 마주 오는 자전거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가벼운 접촉사고가 생겨 버렸다. 도로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라 약간의 번거로움이 예상되는 일이다. 이 일로 하루 종일 기분이 개운치 않고 부주의했던 나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더 놀랬을 아들은 자기의 운전면허 실기를 아주 호되게 시켰다고 생각하라며 나를 안심 시킨다. 다음날 보험사와 경찰서 조사계를 거치며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일상이었다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놀란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모임은 누군가가 태우러 왔으며 택시를 타기도 했다. 얼마 뒤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아야만 했을 때도 여전히 아들이 타고 있었다. “엄마가 두 손으로 운전하시는 거 처음 보는데요?” “이런 산길에서도 깜빡이를 다 넣고 다니시네요!” “와, 이거 현실감 있는 속도예요?” “접촉사고가 엄마를 제대로 교육 시킨 거였네요!” 옆에서 웃고 있는 아들의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앞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마을 도로의 무법자였다.  

일상에서 내 의지와는 다르게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다치게도 하고 작은 실수가 며칠의 고민거리가 되기도 했다. 일용할 양식을 주듯 소소한 일들을 내려 주신다. 그러면 며칠은 또 스스로의 동굴 속에서 지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말에 아무 일 없이 산다는 것이 지루함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 살아요. 똑같은 침대에서 일어나고 똑같은 욕실로 들어가요. 똑같은 칫솔질을 하고 똑같은 아침 메뉴를 고르고 똑같은 소파에 앉아 똑같은 창가를 내다보지요. 똑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똑같은 사계절을 느끼고 똑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똑같은 일상으로 들어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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