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호르몬. 20×15. 2020.
성장 호르몬. 20×15. 2020.

“집으로 돌아갈 때 열차를 타고 가는 건 어때요?” 친구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매우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이었지만 지적이며 여행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그가 시간은 길겠지만 낭만이 있을 거라 말한다. 열차시간을 알아보니 경주에서 진주까지 버스로 두 시간 거리가 네 시간 넘게 걸리는 무궁화호 열차였다. 잠시 머뭇했지만 나에게 권할 때는 그럴 만하니 그럴 거라 여겼고, 어렵게 뱉은 말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친구 집에서 며칠의 여름휴가를 보내다 경주역까지 배웅을 받으며 열차에 몸을 실었다.

뜨거운 한여름, 오후 네 시가 넘어 경주를 출발한 열차는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내내 좌측 창으로 끝없이 바다가 펼쳐졌다. 부산 시내를 통과할 때는 그 풍경이 마치 근대영화의 한 장면이었고 기차를 타고 가다 해리포터를 쓰게 된 롤링이 생각났다. 낙동강을 끼고돌 때는 강변의 풀 무더기가 붉은 낙조와 뒤섞여 고흐의 붓 터치를 상상했다. 점점 짙어지는 파란 밤하늘을 보았다. 도착하니 어둠이 익숙한 아홉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 대신 낭만으로 잘 바꿔 먹었다며 그 흥분을 전했더니 이후로도 친구남편은 나를 뜨겁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기도 하고 한참 어리기도 하다. 그들은 나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고개를 젓기도 한다. 그들이 괜한 걱정을 해줄 때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가도 나는 곧장 접어 버린다. 그러고는 귀가 얇은 것에 참 감사해 했다. 너무 고집스럽지 않은 얇은 귀가 어떤 받아들임에는 장점이 되어 주었다. 긍정이라고 하기도 하고 융통성이라고도 다독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키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그냥 다 좋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뼈와 근육이 아프지는 않았다. “뭐가 그리 좋아요?” “싫지 않아요?” 라고 물어오면 “좋을 대로 내 생각을 맞춰요” 라고 곧잘 대답한다. 살다 보니 내가 꼭 옳지만은 않았던 적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남들도 옳았다. 따라 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그래서 난 당신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성장호르몬이 나온다고 푸념을 한다. 사춘기에는 호르몬 분비가 그리도 더디더니 다 늘그막에 성장호르몬이 넘쳐 난다고 농을 던졌다. 

“순원 선생, 글씨에세이에 누구나가 알아먹을 수 있게 글씨를 쓰는 건 어때요? 밑에 해석 없으면 무슨 글자인지 어찌 알겠어?”

(속으로 혼잣말로) ‘내 글씨는 예쁘게 써서 쉽게 알아먹어야 하는 그런 캘리그라피가 아니라고요! 서예(書藝)란 말이지요. 글씨예술! 예(藝)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거기에다 필력(筆力)이 주는 예술이 서예란 말이에요!’

그러고는 슬그머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댄다. 

“이번 에세이 글씨, 무슨 글자인지 알아먹겠어? 밑에 해석 덮고 한번 읽어봐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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