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판화版畵란 나무, 금속, 돌 등의 판에 그림을 새겨, 그 판에 먹이나 물감으로 채색을 하고 종이나 천 따위에 찍어 낸 그림을 이릅니다. 이런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이를 두고 판화가라 하지요. 또 나무를 활용하여 판화를 그리는 이를 목판화가라 부릅니다. 

중학교 미술 시간. 시커먼 고무판에 그림을 그리고는 조각칼로 파내던 기억이 납니다. 먹물을 묻혀 하얀 종이에 찍어 형상을 표현합니다. 나비, 새, 손, 사과, 얼굴 등이 그림 소재였지요. 아이들은 처음 해 보는 작업이라 세련미는 없고 그림은 투박했을 것입니다. 재주가 메주였던 나의 작품은 특히나 우스꽝스러웠을 것이고요. 

한동안 잊고 지냈던 판화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림을 보며 떨리는 설렘은 기대 이상으로 컸습니다. ‘판화로 시를 쓴다.’는 목판화가 이철수의 그림과 글맛을 기웃거려 보겠습니다.

“염주끈이 풀렸다 / 나 다녀간다 해라 / 먹던 차는 / 다 식었을 게다 / 새로 끓이고, / 바람 부는 날 하루 / 그 결에 다녀가마 / 몸조심들 하고 / 기다릴 것은 없다” - 〈좌탈座脫-염주끈이 풀렸다〉

‘좌탈’은 스님들이 앉아서 해탈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꼿꼿한 자세로 노스님이 앉아 있습니다. 스님의 표정을 어둡게 나타내어 무슨 상념을 하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자세는 한 치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단아한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엄숙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눈을 감고 있거나 혹은 뜬 채로 은은히 사색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다양한 상상의 나래가 마구 뒤섞여 하늘을 어지럽힙니다. 

스님 앞에는 오래되어 시커먼 낡은 주전자가 놓여 있습니다. 바닥에 닿은 주전자의 엉덩이가 펑퍼짐하여 쉬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절의 터줏대감으로 보입니다. 손잡이는 뜨겁지 않도록 높이 두어 연륜이 풍기는 옛 정취가 침착하게 묻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염주의 끈이 풀려 염주알 몇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주전자와 염주알을 보면 마치 정적과 역동을 느끼게 합니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스님의 마음은 정중동靜中動과 動中靜동중정이 조화를 이룬 한 폭의 여유로운 동양화에 잠시 머물 겁니다. 하지만 이조차 스쳐 가는 분진에 불과하겠지요. 

“기다릴 것은 없다”는 끝 구절이 말씀의 여백처럼 들립니다. 이는 네가 절간에 들어와 절밥을 얻어 먹으면서, 뭔가 “느끼기는 하느냐”라는 되물음으로 날아와 뇌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낯선 이승에 발을 디밀어 생生을 먹어 치우면서 무엇을, 어떻게 꾸려 왔는지 자문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 내 손님으로 오실 때야 / 피해 가지 못하지만 / 나가서 / 불러들일 일이야 아니지. / 내 생애가 / 적적하기만 하여 / 손님 받을 겨를이 / 없었다. / 이제 되었으니 / 그만 나가서 / 문 닫아걸어라” - 〈좌탈座脫-깨달음이 내 손님으로 오실 때야〉

스님이 머리를 조아리고 묵묵히 앉아 있습니다. 주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낮잠을 즐기느라 마음을 비웠는지, 정진 수행 중이라 다소곳이 머무는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깨달음이란 게 어디 찾아 나선다 하여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고리 잡고 담장 너머를 보며 하염없이 기다린다 하여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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