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포인(浦人) 천광영 작가를 만나다

[뉴스사천=고해린 기자] 미세먼지 하나 없이 쾌청했던 지난 14일 오전, 차를 몰아 사천시문화예술회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포인(浦人) 천광영(61)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다. 

포인(浦人) 천광영 작가가 그의 작품 ‘인생무근체(人生無根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속을 비운 대나무를 쳤다. 또한 협서(脇書, 덧붙이는 말을 옆에 쓰는 것)로 도연명의 시를 발췌해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주제를 담아냈다.
포인(浦人) 천광영 작가가 그의 작품 ‘인생무근체(人生無根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속을 비운 대나무를 쳤다. 또한 협서(脇書, 덧붙이는 말을 옆에 쓰는 것)로 도연명의 시를 발췌해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주제를 담아냈다.

마침 전시실 입구에서 천 작가를 만났다. 전시실로 들어서니 오전의 나른한 그늘 속에 숨죽이는 작품들이 보였다. 천 작가는 분주하게 조명을 켜고 잠들어있던 작품들을 깨웠다.  

먼저 함께 전시 작품들을 둘러봤다. 가지각색의 크기인 서예 40점과 문인화 20점이 제자리를 찾은 듯 안정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올해로 환갑이 됐어요. ‘육십갑자’라고 시작을 하고 돌아오는 기점이 된 거죠. 살면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는데, 고향이라는 ‘제 자리’로 돌아 온 느낌으로 작업했습니다. 뭐든 박자가 맞아야 돼요. 작품, 관객, 모든 것이 딱 맞는 때가 마침 지금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듯이 저는 작품을 남기는 거죠.” 

개인전을 어떻게 구상하게 됐냐는 물음에 솔직담백하면서도 거침없는 답이 돌아왔다. 천 작가는 섬세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손짓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84년 4월에 서예에 입문해 35년이 됐어요. 문인화는 10년 전부터 시작했죠. ‘서화동원(書畫同源)’이라고 글과 그림은 ‘일맥상통’해요. 서화를 병행하면서 붓은 너그럽고 마음은 부드러워졌습니다. 첫 개인전인 만큼 청중들에게 정의, 행복, 부부, 희로애락 등 그동안 제가 그려온 여러 주제를 스크린처럼 펼쳐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담소를 나누며 걷다 보니, 전시실 한가운데 크게 자리한 10폭짜리 병풍이 시선을 끌었다. 천 작가의 특기라고 불리는 ‘예서’로 쓴 금강반야바라밀경 작품이란다.

“병풍 한 폭만 해도 500자가 넘는데, 10폭 짜리니까 정확히 6,968자네요. 한 폭 작업하려면 옴짝달싹 안하고 꼬박 네다섯 시간을 집중해야 했어요. 구상만 4개월이 걸렸죠. 또 작품이란 게 종이, 먹물, 필압, 속도, 비례 등등 모든 것들의 궁합이 어우러져야 해요. ‘종이 고르기’만 수십 번, 도공이 맘에 안 들면 자신이 만든 그릇을 깨고 깨듯 그런 과정 속에 탄생한 작품이죠.”

‘고뇌와 수행의 시간’이었다며 농담처럼 웃었지만, 프린터로 찍어낸 듯 또박또박한 글씨가 천 작가의 ‘피, 땀, 눈물’을 보여주는 듯 했다.

천광영 작가와 아내 정숙재 씨가 불교 경전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예서로 작업한 10폭짜리 병풍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천광영 작가와 아내 정숙재 씨가 불교 경전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예서로 작업한 10폭짜리 병풍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그가 세상에 내놓은 작품들을 바라보며 문득, 그는 어떻게 서예를 시작 하게 됐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60년 동안 계속 이 지역에서 쭉 살았어요. 포인(浦人)이라는 호도 삼천포 할 때 ‘포’하고 사람 ‘인’자를 써서 고향 색이 드러나게 지었어요. 말 그대로 갯가 사람, 나 ‘삼천포 사람’하고 지은 거죠.”

천광영 작가는 1960년 삼천포에서 3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건축과 목공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넉넉하던 가세가 기울고, 생계를 꾸리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 됐다. 누군가 ‘니 꿈이 뭐니?’하고 물으면 지체 없이 ‘화가’라고 답하던 소년은 그때부터 꿈을 속으로만 품게 됐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동창들은 절 그림 잘 그렸던 애로 기억해요. 성장하면서 형편이나 여건이 안 되도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이 있었어요.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거야’란 맘을 품고 살았죠.”

먹고 사는 일을 고민하던 그는 83년 당시 ‘한전’이던 지금의 남동발전에 입사했다. 스스로 돈을 벌게 되자 곧장 그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장과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그는 ‘서예’를 만났다. 

“그 당시 삼천포 관내에 그림 배울 데가 드물었어요. 스승을 찾기도 힘들고 서양화나 동양화는 미대를 가야 쳐주는데, 직장인인 제 페이스하고는 안 맞는 거죠. 서예는 나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때부터다. 그는 야간대학을 다니듯 낮에는 직장을, 밤에는 서예학원을 다녔다.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 서예에 파고드는 열정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가히 ‘주경야독’이 아닌가. 오죽하면 91년에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하고 결혼한 게 아니라 서예하고 결혼했냐’는 소릴 들었다며 천 작가가 웃었다.     

“사실 문인화를 시작하게 된 데에는 아내의 영향도 있죠. 서로 사랑하려면 마주보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봐야 행복하다는데, 저희는 ‘문인화’라는 같은 방향을 보니까 행운이죠.”

그의 아내는 문인화 작가로 활동하는 정숙재(58) 씨다. 지금 부부는 함께 서예‧문인화실을 운영하고 있다. 낮에는 정 씨가 화실을 보고, 저녁에는 천 씨가 직장에서 퇴근해 화실을 운영한다.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는 이가 있어서일까, ‘행복’이란 그들에게 멀리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 동명의 작품이 있어 천 작가가 소개했다. 

“이 ‘행복(幸福)’이란 작품이 인기가 많은데, 작품을 자세히 보면 ‘행’자는 소나무가 한그루 자라난 느낌이고, ‘복’자는 기름진 땅처럼 보이게 했어요. 땅이 부유하고 기름져야 나무도 잘 서겠죠. 음양의 조화를 담아냈어요.”

천 작가의 작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의 작품들은 ‘읽는 글씨’에서 끝나지 않고 ‘보는 글씨’의 재미까지 더해냈다. 한 작품 한 작품 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깊은 통찰과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전시 작품 '행복(幸福)'. 천 작가는 기름진 땅 위에 자라난 나무를 글씨로 형상화 했다.
전시 작품 '행복(幸福)'. 천 작가는 기름진 땅 위에 자라난 나무를 글씨로 형상화 했다.

작품들을 작업하면서 어렵거나 힘든 점은 없었는지, 한계에 부딪치진 않았는지 묻자, 이에 대한 답이 지혜롭고 명쾌하다.

“제 작품 중에서 ‘근능보졸(勤能補拙)’이 있어요. 부족한 것은 노력해서 채운다는 뜻인데, 서예도 하면 할수록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이 보여요. 작품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도 ‘내탓이오~’하면서 손이 기억하도록 계속 연습하면 어느 순간 눈 감고도 손이 저절로 알아서 하더라고요.” 

첫 개인전이지만, 그는 벌써 다음 단계를 향한 걸음을 딛고 있었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어떤 전시를 하고 싶냐고 묻자, 테마를 좀 바꿔서 젊은 세대들을 위해 캘리그라피나 SNS쪽으로 연계된 전시를 꾸며보고 싶단다.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그는 꽤나 ‘영리한’ 작가가 아닌가. 직장 동료들도 응원해주고, 4월에 나올 사내 잡지 표지모델도 하게 됐다며 천 작가가 웃었다. 

전시 작품 '석란Ⅰ', 천 작가는 문인화로 지난해 대한민국문인화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전시 작품 '석란Ⅰ', 천 작가는 문인화로 지난해 대한민국문인화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서예는 서예대로, 문인화는 문인화대로 향기와 매력이 있다는 그. 한 분야를 10년 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데 그에게 ‘서예’는 어떤 의미일까?

“처음 서예 시작할 때부터 제가 초심으로 간직하는 좌우명이 있어요. ‘행백리자반구십리(行百里者半九十里)’인데, 백 리를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반으로 친다는 뜻이에요.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거죠. 최선의 최선까지 해야지 바라던 원래 목표에 다다를 수 있어요.”

인터뷰가 끝난 후, 한 필의 ‘붓’처럼 살아온 천 작가와 악수를 나눴다. 그의 담백한 웃음과 함께 은은한 묵향이 공기 중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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