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運). 20×15. 2020.
운(運). 20×15. 2020.

 

마음 가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오늘따라 붓이 생각처럼 움직여 주질 않는다고...... 붓을 내려놓고는 작업실 문을 빠져나온다. 차 시동을 걸었더니 시계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속도를 올리지 않았을 때, 저만치 오는 차를 먼저 보내려 브레이크를 가볍게 밟았다. 차는 그대로 계속 미끄러지고 있었다. 밟는 힘이 부족했었나 여기며 제법 먼 거리라 그냥 가던 길을 달렸다. 순간 속도를 내려다 방금 전 그 느낌이 이상하다 싶어 일부러 살짝 브레이크를 다시 밟아 보았다.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혹여나 브레이크 밑에 무언가가 들어가 있을까 싶어 발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다. 순간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행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고 한적한 곳이라 다니는 차는 거의 없었다. 출발하자마자 느낀 감각이라 속도를 크게 내지는 않았다. 근처에 강제로라도 차를 멈춰 세울 곳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마트 주차장이 있다. 불 꺼진 마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면서 벽을 향해 최소 견적을 생각했고, 벽이 가까워지니 사이드브레이크가 생각났다. 차가 멈추어 섰다. 그대로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들어 레카차를 부르고,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그때에서야 벚나무 가지가 가득한 캄캄한 거리가 보였다. 밀려드는 허기에 야식집을 찾아 뜨끈한 우동 한 그릇씩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면서 오늘은 참 운수 좋은 날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정비 공장으로 달려가 어젯밤 일을 이야기하고선 차가 고쳐질 동안 작업실로 가 기다리기로 했다. 작업실 문 앞에 서니, 아차! 차 키에 함께 달려있던 작업실 열쇠가 생각났다. 지금 나에겐 차도 없고 추위를 피할 작업실 문도 잠겨 있었다. 

근처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 새로 오픈한 이곳은 화려하고 웅장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크고 많은 창으로 햇빛이 넘쳐났다. 젊은 주인 사내는 하루 동안 팔 제법 많은 양의 빵을 굽고 있었고, 그보다 더 젊은 아르바이트생은 커피를 내린다. 젊은 주인 사내는 표정이 힘겨워 보이고, 더 젊은 아르바이트생은 불편해 보였지만 힘겨워 보이진 않았다. 사람 사는 일이 어찌 보면 공평할 수도 있겠다고 중얼거렸다. 

푸른 바다에서 빛나는 저 윤슬과 큰 창으로 들어오는 저 온화한 햇살과 내가 신앙처럼 좋아하는 하얀 잔에 담긴 진한 커피는 브레이크도 열쇠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첼로로 연주되는 베이스가 감미로운 클래식이 흐르고, 빵 냄새가 커피 향과 섞여 이국적인 욕심을 채운다. 럭셔리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는 오늘도 참 운수 좋은 날이라며 바다만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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