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⑱‘일신당표구’ 호산(湖山) 김종욱 선생

군대서 틈만 나면 전시회 구경이 표구사 운영으로
“감상안이 좋아야 작품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어”
젊은 우천(牛川) 만났을 땐 ‘한 획 그을 친구’ 예감
인생 제2막에 열정 쏟는 시조창…“나를 위한 음악”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가끔 부러운 누군가의 인생을 만날 때가 있다. 학문적 성취가 뛰어나거나 도덕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 주위에 칭찬을 듣는 사람들. 엄청난 부를 쌓아 사회와 이웃에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 때론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람들 모습에서도 존경의 마음이 일곤 한다. 그 중 가장 으뜸은 취미나 재미를 살려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다. ‘아무리 노력하는 자라 해도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나.

▲ 45년을 표구 일에 몰두해온 호산 김종욱 선생이 인생 제2막을 시작하고 있다. 12월 2일 자신의 서재에서 촬영.

그런 사람을 만났다. 호산(湖山) 김종욱(69) 선생이다. 그는 평생을 표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분이다. 스물다섯에 시작해 내년이면 일흔이니 45년은 족히 채웠음이다. 모르긴 해도 사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김 선생의 손이 간 글씨나 그림, 사진 하나쯤은 집에 걸어두고 있지 않을까. 

“군대 생활을 공군에서 했어. 대통령 전용기 경비 서는 업무였는데, 주말이면 외박을 나갈 수 있었던 거야. 나는 그때마다 서울 시내에서 하는 전시회를 주로 찾아 다녔지. 동료들은 야구장에 가거나 유원지로 놀러 다닐 때야. 한번은 동료들을 전시회에 데려 갔더니 재미없다고 다시는 안 따라오려 하더라고? 허허~”

정말 범상치 않은 취미다. 지금껏 많은 이들의 군대 이야기를 들었지만, 주말마다 전시회를 찾아다녔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1970년대 초반이면 대부분이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절인데,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것일까? 하지만 선생의 이야기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태어난 곳은 삼천포 선구동이야. 문선초를 졸업하고 사천읍으로 올라왔는데, 다 먹고살기 위한 어른들의 궁여지책이었겠지. 학력도 중졸이 끝이야. 그런데 글씨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는 일은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기본 정도는 익혔지. 하지만 이게 만만치 않잖아? 돈도 많이 들고.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일찌감치 포기했어.”

결국 가난 때문에 예술가의 길을 애초에 접은 셈이다. 대신 제 2의 길을 선택했다. 예술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표구사(表具師)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부대에서 서울로 나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때 김포 정류장 옆에 표구사(表具捨)가 하나 있었거든. 오고가며 그 집에서 한참 있었지. 작품도 보고 작업하는 것도 보면서 말이야. 몇 번 보니까 나도 할 수 있겠더라고? 그래서 ‘이거다’ 했지.”

그저 작품 감상만으로도 행복했던 그는 1975년 6월에 전역하고선 10월에 바로 표구사를 차렸다. ‘어디 직원으로 들어가 일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구멍가게라도 내가 직접 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까닭이다. 세입자의 설움을 겪으며 사천읍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은 늘 가득했단다.

“일감이 들어오면 나는 먼저 작품부터 감상해. 취미이자 재미지. 표구하는 일도 감상안(=작품을 보는 안목)이 중요하거든. 작품을 더 돋보이게 해야 하니까. 결혼한 뒤로는 꽃집을 같이 했어. 안사람이 꽃꽂이 자격증을 가졌거든. 그러니 우리는 너무 좋은 거야. 남들은 돈을 주고 꽃을 사는데, 우린 돈 벌면서 꽃을 보니까. 작품도 마찬가지지.”

참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선생은 평소 잘 아는 사람이 허접한 작품을 가져올라치면 표구하지 말기를 권했다고 한다. 낭비하지 말란 얘기다. 학생들 작품에는 값을 깎아 줬다. 간혹 작품에 소질이라도 엿보이면 조언을 덧붙이며 격려했단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우천(牛川) 강선규(57) 씨다. 우천 선생은 1996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했을 만큼 서예가로 전국에 이름을 떨친 분이다. 선생은 우천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가게를 열고 그리 오래 된 것 같지 않으니까, 우천이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네. 어느 날 글씨를 들고 왔는데, 예사롭지 않아. 글씨도 결국 조형예술이라서 구도나 음양이 중요하거든. 감각도 좋아야 하고. 사실 점 하나만 봐도 실력을 알 수 있지. 그런데 우천의 글을 보는 순간 ‘이 친구 한 획을 긋겠다’ 싶은 거야. 내 예감이 맞았던 거지.”

이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지금까지 돈독한 사이를 이어간다. 특히 1990년대 중반엔 선생의 건물에서 우천 선생이 서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어쩌면 ‘서예대전 대상’이란 싹이 움텄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이가 40대에 이르니까 지역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드는 거야. 그래서 3층짜리 건물을 짓고 2층을 갤러리로 꾸몄어. 내 호를 따서 호산갤러리라 했지. 그런데 우리 동네가 문화적으로 너무 열악하다 보니까 호응을 못했어. 그룹전, 개인전. 그리고 내가 가진 작품들도 한 번 전시하고, 분재, 난 이런 것도 전시했는데, 오래가지 못했지. 의욕만 앞섰던 거라. 1년 남짓 만에 ‘안 되겠다’ 생각하고 우천한테 서실로 쓰도록 했지.”

▲ 호산 김종욱 선생.

호산 김종욱 선생은 이태 전 인생에 큰 전환기를 맞았다. 읍사무소사거리 모퉁이에 있던 일신당표구사를 정리한 것이다. 1995년부터 무려 22년을 보냈던 곳이다. 예전에 비해 표구 맡기는 일도 많이 줄고 나이도 들어 인생 제2막을 열고 싶었단다. 그럼에도 표구 일을 완전히 끊진 못했다. 오래된 고객들이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인리의 새 거처 한쪽에 작업실을 따로 두었다.

인생 제2막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일이다. 이는 사실 새로울 게 없다.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아온 삶이니까. 다만 시간 내기가 더 편한 만큼 좋은 작품전시회나 특별전이 있으면 꼭 챙겨보려 애쓴다. 서울이고 광주고 발품을 팔아 달려가는 일은 예사다. 행여TV에서 무언가 눈에 띄기라도 하면 수소문을 해서라도 궁금증을 풀어야 직성이 풀린다.

다음은 시조창이다. 이 역시 10년 전쯤 시작한 새로운 취미인데, 최근 들어선 전문가들도 실력을 인정하는 수준으로 올랐다. 올해 전주대사습놀이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데 이어 11월에 있었던 제12회 지봉 임산본 대상 전국 정가경창대회에서는 시조부문 2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1급 심사위원 자격증도 있어서 웬만한 지역대회에선 심사위원으로 나선다. (사)한국전통예악총연합회 사천지부에선 후학 양성도 맡고 있다.

“‘몸이 악기’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게 시조야. 오로지 목소리로 하는 음악이니까. 산행하다 잠시 쉬면서도 할 수 있고 화장실에 앉아서도 할 수 있지. 호흡이 길어지니 몸에도 좋고 정신수양에도 도움이 돼. 어쩌면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한 음악이지.”

선생은 인생2막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것이 또 하나 있다고 했다. 그가 표구사를 운영하며 틈틈이 수집한 작품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내놓는 일이다. 가능하면 사천에서, 굳이 자신 소유가 아니더라도 좋다고 했다. 공공기관에서 만든 전시관에 기증하는 것도 가능하단 얘기다. 그의 꿈이 꼭 이뤄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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