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육바꾸기. 20×15. 2019.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이다. 쓱싹쓱싹... 쓱쓱쓱... 어색해져 버린 부엌 싱크대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세정제를 풀어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묵은 때를 벗겨 내고 있었다. 아파트였다면 이 시간에 어림도 없을 거라고 혼잣말을 해대며 개수대 물을 시원하게 내려 보낸다. 한동안 엄마놀이를 멈춘 탓에 우리 집은 아빠와 아들의 자취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새벽에 지쳐서 집으로 들어가면 두 남자가 음식을 해 먹느라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설거지거리에 눈살을 찌푸렸다가도 금방 미안한 마음이 들어 대충 정리하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눈에 보이는 저 때 자국을 속 시원하게 닦아내고 싶었지만 붓 잡는 손을 아끼고 싶었다. 손 근육에 힘을 주고 싶지 않았다. 

때를 벗기고 광을 내니 이제까지 쓰지 않았던 근육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색한 근육의 움직임들로 묘한 희열이 느껴진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개인전과 글씨 콘서트 준비로 손목과 손가락 근육 그리고 머리 근육만 한없이 움직여 댔다. 지금은 싱크대 위에서 단순히 상하좌우로 낯선 근육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새로운 근육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동안 밤을 새워야 했던 탓에 불이 꺼지지 않았던 바닷가 작업실을 잠시 비우고 원래의 자리였던 제자들이 공부하는 도심 속 서숙(書塾)으로 작업 거리를 잔뜩 옮겨 놓았다. 접어야 하는 생각이나 마음을 바꾸는 데는 장소를 옮기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동안 서숙은 낯설어져 있었다. 여전히 이곳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모든 게 그대로였다. 거리는 상점과 커피가게 불빛으로 따뜻했고, 술에 취한 사람들과 식당에서 들리는 건배사가 흥겨웠다.

제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서숙에서 또다시 불을 훤하게 밝히고 붓을 들었다. 몸의 근육이 아니라 장소의 근육을 바꾸고 보니, 내 몸이 기억하는 근육은 이곳에서 수많은 인생들을 만났던 옛이야기를 기억해 내고 있었다. 새로운 곳이 아니라 정들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 나의 근육이 가장 정직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조금씩 예전의 근육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애초부터 사용했던 근육이다. 그 근육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리게 움직였던 잔근육에서 이젠 제법 굵은 힘줄이 보인다. 간혹 그동안 사용하지 못한 탓에 경련도 일어나겠지만, 뭐 경련 일으킬 때 심장만 살며시 움켜쥐면 되지 않을까, 그냥 그래 볼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쿵쿵쿵 심장을 두드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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