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洙南) 이름 속에 사주(泗州)
풍패지향의 자긍심 녹아 있어

▲ 한내천의 물길을 돌려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간척 계획도시 ‘삼천포’의 현재 모습.

[뉴스사천=김학록 시민기자]
몇 해 전 우연히 입수한 사진 한 장이 고민을 자아냈다. 통창 언덕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찍은 사진으로 왼쪽으로 보이는 팔포 백사장은 알겠는데 오른쪽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바다가 이해가 안됐다. 언덕 아래 서너너덧의 창고가 있어 통창 임엔 분명한데 팔포에 응당 있어야 할 한내천이 보이질 않는다. 어딘가 끊겨야 할 초가들은 끊임없이 이어져 노산까지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전언에 의하면 노산 호연재를 건너갈 때 물이 깊어 다리를 놓았고 그 다리를 노다리라 했으며 그 이름을 따 명명한 탓에 그 산은 지금도 노산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사진으로는 그 어디에도 다리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때부터 옛 사진을 소장하고 있다면 한달음에 달려가 사본을 만들고 컴퓨터에서 해상도를 높여가며 오늘날의 지형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시간의 간극 속에 숨어있는 옛 모습에서 오늘의 변화를 가늠하려 애썼다.

▲ 조선총독부 시절에 제작한 삼천포 간척시가화 계획도. 지금과 비슷비슷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던가. 최근 도시재생을 위해 수집한 아카이빙 자료 속에 귀중한 도면 몇 점이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되어 주었다. 조선총독부 시절 제작한 삼천포 도시계획 평면도가 그것인데, 계획도인데도 대부분 그 도면대로 실행돼서인지 오늘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림대로라면 격변이라 표현해야 옳다. 수천 년간 변화 없이 살아오던 강토에 백 년만의 상전벽해다. 바다가 변해 도시가 되었고 섬이 다가와 도심의 공원이 되었다. 제법 높았던 구릉은 깎이어 적당한 높이의 동산이 되었다 해야 옳았다. 한국사를 통틀어 계획도시의 시초이며 매립으로 만든 계획도시다.

▲ 팔포교 건너편에서 찍은 팔포 당산나무 앞.
▲ 팔포교 건너편에서 찍은 팔포 당산나무 앞. 예전에는 소형선박을 이 곳에 정박시켰다.

놀라운 사실은 중앙시장과 구도심 중심상권 대부분이 갯벌로서 간척된 바다였다는 점과 오늘의 한내천이 팔포의 허리를 잘라 바다로 낸 인공하천이라는 점이다. 일제 계획도에는 갈대 샘이 있던 선짓개에 팔자모양의 삼각주가 형성돼있고 그 물은 모여 지금의 용궁수산시장 중앙대로로 흘렀다. 또 노다리는 노산 앞에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의 밀양돼지국밥 앞에 만들어져 선구동과 팔포를 잇고 있었다.

일제는 1910년 강제합병 전후 전국의 토지를 조사했고 아울러 간척으로 국유 토지를 늘렸으며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일본에서 한반도 진출하는 개인이나 기업에 헐값으로 돌려 팔았다. 그 무렵 수산자원의 보고였던 삼천포지역의 매립을 통한 현대화는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한 쪽으로는 연안어업의 중심기지이면서 전국에 수산물울 공급하는 물류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말문향과 각산향은 대한제국에 들어 삼천진의 지명을 따 삼천리가 되었다가 문선면과 수남면을 거친다. 말문의 억울함을 씻기 위한 문선면의 문동리와 문서리는 오늘에 동서리만 남게 되고 수남면의 으뜸마을 선지리와 구평리는 그만 머리글만 따 선구리가 돼버렸다.

옛 문화원자리 앞에 한때 구신둠벙이라 불리던 선녀탕은 선지의 본뜻이다. 수남면의 으뜸마을 거북등은 지형이 금구하천형으로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세의 복된 땅으로 예부터 아홉 명사가 배출될 곳이라 해서 지금의 삼천초교가 유지방골에 터전을 잡았다. 삼천진이 있던 구남진은 지금은 남동화력의 사옥이 들어섰다. 거북의 앞 다리는 매립으로 잘려나가 흙굼탱이 지명으로 오늘에 전하고 그 자리는 한때 일본신사가 자리했다가 최근까지 궁도장이었다.

▲ 통창에서 찍은 1921년 사진. 멀리 창선도와 청널이 보인다. 가운데 바다에 노다리가 보이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한내천이 조성되기 전이다.

백년을 이어온 간척의 대역사였다. 팔포의 지명유래는 어쩌면 선짓개 갈대밭이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삼각주 팔자 물길은 사라졌지만 그 팔(八)이 팔장을 만들고, 그 팔장개가 팔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와룡산의 선천(先川)은 큰 강인 한내가 되고 그 한글 이름인 앞강은 팔장개로 흘러 내렸다. 그 앞강과 대별될 뒷강은 노다리를 만나 노타리로 연명하다가 이젠 종적을 감추었다. 고려 수도 개경에서 물길로 삼천리라 이름 붙여진 삼천포, 매향의 이타심의 본향 향촌(香村), 금모래의 비단골 금동(錦洞), 선녀탕의 선지(仙池)와 거북등 구평(龜坪), 문선(文善)의 횟대거리 꽃다울 큰 고을 대방(大芳), 그 터전에서 잃은 남일대(南逸臺)의 빼어난 사주(泗州)의 남녘, 수남(洙南)을 찾아 가는 것이 어쩌면 재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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