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삼조 시인.

영화 「기생충」을 보고 난 후 우울한 기분을 한참 떨치지 못했다. 외국의 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하고 천만 관객을 곧 동원할 것이라는 영화기에 큰 기대를 하고 보았으나 영화는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충격적이었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얽혀 여러가지 생각해 볼만한 일화를 만드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재미있게 볼만 했으나 그 결말이 끔찍한 살인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영화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일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범죄를 다룬 경우일 때가 대부분이고, 이 영화처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살인이 벌어지는 일은 드물다. 이 영화의 결말인, 선량해 보이기만 하던 한 가난한 가장이 아내의 돌발적 죽음에 충격을 받은 끝에 고용주인 부자의 이벤트 행사에 참가 중인 가난한 다른 가족의 한 딸을 살해하고, 그 딸의 아버지는 그를 고용해 준 죄 없는 부자 가장을 얼떨결에 살해하는 ‘살인’ 행위의 설정은 우리 사회가 정말 이렇게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물론 큰 상을 준 평론가들도 상을 준 마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도 영화의 효과라든지 하는 나름대로의 영화 문법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영화는 사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기에 꼭 현실에 있어야 할 이야기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영화가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은 작은 것이 아닐 수 있다. 천만 관객이라면 이 영화 등급인 15세 이상 관람 가능에 해당하는 국민의 네 사람 중 하나 이상은 이 영화를 봤든지 장차 볼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즉, 빈부격차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으며 그 해소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을 더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일 이 영화의 착한 메시지에 영향을 받을 사람이 많을 반면에, 은연중 부자들이 부를 독차지하기 때문에 내가 가난하다든지 나아가 부자는 악의 편에 가깝다는 선입견을 자기도 모르게 가지게 될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에 보면 가난한 주인공 가족의 반 지하 셋방에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고 서툴게 쓴 액자가 걸려 있었다. ‘편한 마음으로 자기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이라는 뜻이라 한다. 가난한 주인공 가족은 영화 속에서 이 말대로 살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더 불행해 졌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정은 당사자 아니면 다 알 수가 없다. 남이 남의 인생에 대해서 결과만을 가지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속담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했다. 가난을 벗어나려면 그 당사자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는 그 ‘나라님’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해 주어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그 기회를 틈타 가난을 벗어나는 일은 온전히 그 당사자의 몫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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