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에서 제37회 경상남도 연극제가 한창이다. 연극제를 알리는 현수막을 보면서 문득 20년도 더 넘은 추억을 소환한다.

대학 다닐 때는 연극동아리 극예술연구회에서, 사회에 나와서는 극단에서 연극을 했었다. 젊었던 그 시절 연극무대의 추억들이 가슴한곳에 남아 설레지만, 나의 무대는 설렘과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연극무대 위 베테랑 배우가 내게 더 돋보인 건 당연한 일이다.

25년 전쯤 창원예술극단은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작품으로 거창국제연극제에 참여했었다. 연극의 첫 장면은, 지금은 진해 극단 ‘고도’에 있는 김소정 선배가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다 관객에게 독백하는 모습이었다.

첫 공연을 무사히 끝낸 뒤 스탭이었던 나는 두 번째 공연 전 컴퓨터 전원을 빼고 청소기를 연결해 청소를 하던 중, 다른 일이 생겨 청소기를 동기에게 넘겨주고 갔다.

두 번째 공연이 시작되면서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고, 소정 선배는 예정대로 무대에서 컴퓨터를 켰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 선배는 컴퓨터에서 살며시 일어나 무대 한쪽의 책장 쪽으로 가서 책을 하나 꺼내 읽으며 서서히 고개를 들어 관객에게 독백을 시작했다. 나의 첫 베테랑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전선을 뺀 범인이 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첫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던 연출선생님의 분노에 주눅이 들어 말하지 못했다. 대신 동기인 친구가 크게 혼났다. 아직 고백도 못했다.

나의 두 번째 베테랑은 1998년쯤 나타났다. 당시 창원예술극단은 2주간 ‘세일즈맨의 죽음’을 공연했다. 3개월의 연습기간. 당시 나는 작은 배역을 하나 맡아 연습 중이었는데, 둘째아들 역을 맡았던 배우 형이 공연 일주일을 남겨놓고 공연을 못하게 생겼다. 당시 연출 선생님께서 지금은 경남예술회관 조명감독인 이동원 친구와 나를 불러 놓고 둘째아들 역을 한 번씩 시키셨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둘째아들은 그리 큰 역은 아니었으나 무대에 대부분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로 대사 양이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둘째아들 역을 맡아 정말이지 ‘빡센’ 일주일을 보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친구는 도저히 일주일 만에 대사숙지가 어렵다고 보고 오디션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반면 나는 남들 쉬고 밥 먹을 때도 연습을 계속해야 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내가 대사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장면, 장면 특징에 의존하며 대사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한 번은 상대가 꽃을 던지며 “그래요. 난 버러지예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꽃을 움켜쥐며 대사를 치는 것 아닌가. 당황한 나는 순간 “형, 왜이래!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어!”라는 대사를 놓쳤다. 이때 어머니역을 맡은, 지금 함안 극단 ‘아사랑’의 대표인 김풍연(김수연) 선배가 나의 대사를 자신의 대사로 바꾸어 “얘야 왜이러니.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하시겠니?” 하는 수정된 대사로 받아쳤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여 대본상 두 장이나 뒷장의 대사를 하고 만다. 대혼란이었다. 그러나 경험과 능숙의 상징 풍연 선배는 능숙한 대사로 대본의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순식간이었다. 무대 위의 내 심장은 터질 듯 요동치다 숨을 골랐다.

가끔 연극공연을 볼 때면 젊은 배우의 미세한 실수가 보인다.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나의 아찔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연극무대 위에는 사람은 바뀌었을 뿐 베테랑들이 있다. 한 분야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 연극이라는 하나의 작품과 인생에 한길을 걸어온 베테랑들. 그들을 이번 연극제에서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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