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무릇.

산과 공원에 ‘꽃무릇’이 한창이다. 한발 떨어지면 붉은색으로 덮인 꽃무릇 군락에 놀라고, 가까이 다가가면 속눈썹 예쁘게 올린 꽃무릇 꽃에 옴팡 마음을 뺏긴다. 뭐라 해도 산자락을 따라 걷다가 만나는 꽃무릇의 짙은 선홍빛에 가장 설렌다. 얼마 전 옆 동네 하동의 지리산 옛길인 ‘서산대사길’에서 만난 꽃무릇이 올해 본 꽃무릇 중에 최고였다. 

꽃무릇은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본래 이름은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종 모양을 닮았다 하여 ‘석산(石蒜)’이라고 한다. 햇볕이 잘 드는 따뜻한 곳이라면 어디든 잘 자라고, 물기가 많은 곳에서도 잘 자란다. 꽃무릇 군락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의 경우, 꽃무릇의 알뿌리가 장마 때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오다가 물가의 둔치나 평평한 곳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그 덕에 가을이면 계곡 전체가 붉은색으로 채색된다.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 정읍 내장사 등 이 가을에 찾아가면 꽃무릇을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모두 유명 사찰이다. 깊은 산속 스님들이 수행하는 고즈넉한 사찰 주변에 왜 하필 꽃무릇이 많을까? 이유는 꽃무릇의 알뿌리가 가진 알칼로이드(alkaloid) 성분 때문이다. 사찰의 탱화를 그리거나 단청을 할 때 꽃무릇의 알뿌리를 찧어 안료와 함께 사용하면 좀이 슬거나 색이 바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사찰주변에 꽃무릇을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꽃무릇 알뿌리가 방충제, 방부제 역할을 한 셈이다.

꽃무릇은 수선화과 속하는 알뿌리식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상사화’랑 같은 집안이다. 사랑하되 만나지 못하여 생기는 병을 상사병이라 하듯, 잎이 자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말라버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식물을 통상 ‘상사화(相思花)’라고 한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꽃이 진 후에야 잎이 돋아나는 꽃무릇도 결코 만날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어 상사화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상사화는 잎이 먼저 올라오고 그 잎이 지고난 후 7‧8월 무렵에 분홍색 꽃이 피고, 꽃무릇은 8‧9월에 꽃이 핀다. 상사화의 종류에는 붉은색 꽃의 ‘꽃무릇(석산)’과 분홍색 꽃의 ‘상사화’, 전남 백양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이름 붙여진 ‘백양화’가 있다. 이쯤 되면 상사화류에 얽힌 전설도 많으리라. 부친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절에서 탑돌이 하던 처녀를 사모했던 스님의 이야기, 남매로 태어난 운명에 죽어서도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 불로초를 찾아 조선에 온 중국 처녀가 젊은 스님을 짝사랑하다가 결국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가을 초입에 들어선 요즘이야 꽃보다 단풍이다. 관심을 온몸으로 받는 단풍 앞에서 붉은 꽃으로 시선을 끄는 꽃무릇이 그래서 더 대견하고 반갑다. 꽃이 진 자리에 잎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증을 유발하여 발걸음을 다시 옮기게 만드니 이것 또한 상사화류의 전략이 아닌가 싶다. 화려한 꽃이 없다고 외면하지 말라. 잎이 나고, 알뿌리가 추운 겨울을 견디고 나면 다시 그 자리에 어김없이 꽃이 필 것이다. 이번 주말 속눈썹 높이 쓸어 올린 꽃무릇 만나러 어디든 나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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