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창섭 시인.

전혀 낯선 말은 아니겠지요. 그렇더라도 죽음이면 그냥 죽음이지 무슨 존엄한 죽음이라니, 죽음에도 존엄이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면에는 미래로 나아가는 현 시점에서 이제는 죽음에 대한 해석을 달리 하자는 의도가 묻어 있습니다.  

한때 유행처럼 번진 웰빙(well-being 참살이)을 잊지 않고 있겠지요.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의 조화를 통해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미국 중산계층들이 첨단 과학 문명에 항거해 그 대안으로 신세대문화, 자연주의 등을 수용하면서 선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웰빙을 선호하는 사람들 이른바 웰빙족은 육체적으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뿐 아니라 사회, 직장, 공동체에서 느끼는 소속감이나 성취감의 정도, 여가 활용이나 가족 간의 유대관계, 사회적 심리적인 안정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참살이의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실제로 먹거리, 주택, 화장품, 패션, 가구, 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무해하고 친환경적인 재료를 활용하는 변화가 크게 일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으로 이해하며 준비하고 있을까요. 사회적 관심이 증폭하고 있는 웰다잉(well-dying 존엄한 죽음)에 대한 얘기를 꺼내겠습니다. 웰다잉을 일러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품위와 존엄이라,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럽고 난감합니다만, 시대 흐름에 걸맞게 현실감을 반영한 사회적 합의를 거치면 크게 어렵지는 않겠지요. 

『한국죽음학회』는 삶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은, 자신의 생을 뜻깊게 보내는 일일 뿐 아니라 남은 가족들에게도 짐을 덜어 주는 일이기에, 더 이상은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당하는 죽음’은 곧 본인에게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과정이며 때로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습니다. 아울러 가족 형제들에게는 큰 슬픔이면서 견디기 힘든 불만 요인이 되어 마침내 갈등과 분열로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후유증이 심한 부정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얘기지요. 현대 의학으로는 해결하기 불가능한 상황에서 억지로 연명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살아있지만 사실상 죽은 목숨을 고문하는 일이 아닐까요. 

  ‘맞이하는 죽음’이란 말이 낯설게 들립니다. 하지만 죽음을 회피하거나 더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되겠지요. 언젠가는 한번 맞닥뜨려야 할 죽음을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대비하는 것은 현명한 지혜라 여깁니다. 생전에 장기 기증을 서약하고 시신을 해부용 도구로 쓰도록 허락하는 것은 죽음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숭고한 결정이라 하겠습니다. 당장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라도 미래 사회와 환경, 미래 세대를 생각하면 더는 외면하거나 미룰 수 없는 주요한 현안임을 직시해야겠지요. 냉정하고 신중한 판단이 삶과 죽음의 질을 향상시키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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