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이 잦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우리 인권변호사의 상징이라 감히 단언할 수 있는 조영래 변호사가 가끔 떠오른다. 그가 맡은 ‘망원동 수재사건’ 때문이다. 필자가 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그가 저자임이 밝혀진 ‘전태일 평전’을 통해서다. 그가 1971년 청계천 미싱사 청년 전태일의 분신사건을 접하고 사법연수원 연수 중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과 수배생활 끝에 1980년 사법연수원에 재입소하여 1983년 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직후에 맡은 사건이 바로 망원동 수재사건이다. 

1984년 9월 1일부터 시작된 폭우는 사흘 밤낮을 내렸고, 서울시가 관리하던 망원동 유수지 수문이 붕괴하면서 망원동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1만7900여 가구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주민은 8만 명에 달했다. 요즘이야 대형사고가 발생하면 시설 등을 관리하는 국가, 지방자치단체, 건설회사에 책임을 묻는 것이 상식에 속하는 일이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국가에게 어떠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오죽하면 유신정부는 군인 등의 국가배상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이 대법원에서 위헌판결이 나자 위헌의견을 낸 대법관의 옷을 벗기고, 위헌심사를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 위헌조항을 아예 헌법에 넣는 개헌까지 하지 않았던가. 당시 서울시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붕괴된 수문을 파괴하려 했고 대규모 변호인단도 꾸렸다.

조영래가 서울시에 유리한 감정서를 제출한 토목공학 교수에 대한 증인신문에서 무려 5시간에 걸친 반대신문을 통해 그 교수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승소의 결정적 열쇄가 되었다. 5년 10개월에 걸친 법정싸움 끝에 1990년 피해주민에 대한 승소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지만, 조영래는 그해 말 안타깝게도 폐암으로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그 외에도 국가라는 미명하에 저질러진 가장 비열한 폭력으로 불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인 부천 성고문사건의 진실 발견도 그의 몫이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전태일 평전. 당시에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금기시된 터라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이었다. 그래서 당시 작자 미상이던 조영래.

2004년 변호사로서의 첫발을 디디면서 조영래가 변론한 주요 사건에 대한 기록을 살폈었다.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한 기억이 있다. 계절의 변화는 많은 비와 함께 시작된다. 지금도 비가 참 많이도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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