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충북 옥천의 한 가장이 4명의 가족을 약물로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으려 했던 사건이 있었다. 감당하지 못하는 빚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득주도 경제성장 정책에 대한 시비와 정부 내 불협화음에 대한 우려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던 때에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이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로, 가난을 백성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던 봉건 국가, 부양하는 가족을 책임질 수 없다면 차라리 그들의 생명을 거둘 수 있다는 봉건적 사고라니!

가난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방조하는 국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무너지면 남은 가족에겐 희망이 없으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고 가족을 죽이는 국민, 모두가 정상이 아니다. 가족을 먼저 죽이고 스스로도 자살을 결행했지만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중한 형벌만을 기다리는 그 가장의 심정은 죽음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겠지만, 그의 잘못된 선택엔 엄중한 비난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우자와 어린 자녀들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오직 고통만 존재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을 권리가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필자가 그의 처지가 되어보지 못해 함부로 말 할 일은 아니지만, 이유와 처지가 어떠하든 가족의 운명을 그가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채무의 늪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겐 이미 개인파산, 개인회생의 제도가 충분히 가동되고 있다. 또한 혼자만 죽음을 선택해도 남은 가족은 상속을 포기하면 깊은 채무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고, 국가의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자기 아닌 다른 이의 생명을 거둘 수는 없다.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남녀 주인공이 꽁꽁 언 강바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노비의 아들로 살기 위해 도망쳐서 미군장교가 되어 조선에 돌아온 남자는 명문가문의 여식으로 무장의병운동에 나선 여인에게 묻는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은 어떤 나라입니까. 노비는, 백정은 살 수 있는 나라입니까.’라고.

너도나도 경제가 어렵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규모는 호황과 불황을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당신이 구하려는 경제는 어떤 경제인가. 가난을 이유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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