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通(통할 통)’. 50×40. 2018.

“순원선생, 어제 어디 다녀 오셨데요? 아들과는 이젠 괜찮아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르신, 그 일을 어떻게 아시지요?”
“우리 집 양반이 컴퓨터도사야. 보니깐 맨날 순원이 거기에 보이던데?”

오랜만에 미술협회 고문 선생님 댁을 들렀더니 여든의 노부부는 이렇게 나를 맞아 주신다.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은 바깥출입이 거의 없으시어 인사 한번 제대로 드린 적이 없었는데, 안방 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 열린 방문만큼 환하게 웃어 주셨다. 

“이 양반, 컴퓨터에서 매일매일 순원 보고 있어. 그래서 요즘 나도 순원이 어떻게 지내는지 다 알아. 내가 보고 싶다고 그렇게 얘기해도 얼굴 안 보여준 이유가 다 있었어. 항상 바쁘고, 작업하고...... 얼굴 안 보여줘, 이 양반이 보여줘서 컴퓨터로 보고 있어.”
 
이런, 뜨겁게 올라오는 이 감정은 뭐지. 해바라기를 해 주시는 선생님을 자주 챙겨 드려야지 하면서도 내 바쁨을 핑계로 잘 되질 않아 마음 한구석 항상 무거웠는데, 선생님은 벌써 또 다른 공간에서 매일같이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뭘, 맨날 이렇게 보시면서...... 방안에서도 다 보이는 좋은 세상이라 이젠 굳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아도 되겠네요.”

농을 던지며 또 특유의 장난스러운 재롱만 한없이 떨다가 노부부의 집을 나섰다.

페이스북 친구신청이 들어오면 지인이나 들어봄직한 사람들을 제외하곤 받아주질 않았었던 내가, 선생님 댁엘 다녀온 후로부터 제법 자주 수락을 누르고 있었다. 외국인이나 벗은 여자를 제외하곤 누른다. 소심하게 몰래 바라보고 있을 그 어르신 같은 분이 또 계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후 그 어르신은 내 페이스북에 “딸아~” 하며 가끔 댓글을 올리기도 하시고, 나의 전시장 소식을 그곳을 통해 보시게 되면 지인 분들과 아주 어려운 걸음걸음으로 전시실을 다녀가셨다. 같은 지역이지만 소통이 전혀 없었던 서예의 큰 선생님 ‘일현’ 선생님과의 자리도 만들어 참 많은 숙제를 풀어 주셨다. 내 수락 한 번에 많은 인연들이 회복되고, 어르신은 안방에서도 세상과 소통하시며 한없이 응원해 주시고 계셨다. 

이후, 사람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선을 조금 느슨하게 하여 어르신 같은 분들이 계실 것이라며 마음 끈을 풀었더니, 놓칠 수 있었던 것들을 잡을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들을 일상 중에 하게 되었다.

어떠한 정보도 없는 프로필의 누군가가 신청이 들어오면 잠시 생각한다. 연세가 내 아버지만큼 아주 많으실까. 소심하여 드러낼 수 없는 쓸쓸한 고독가일까. ‘그래, 혹시 몰래 나를 사모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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