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개봉하여 강철비와 함께 한국영화 흥행을 쌍끌이 하고 있는 영화 ‘신과 함께(부제 : 죄와 벌)’를 보았다. 만화 같은 얘기지만, 염라대왕마저 감동시켜 주인공의 환생을 명하게 한 어머니의 지고지순의 사랑 앞에 3년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떠올라 눈시울을 붉혔다.

필자의 눈에 비친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저승심판의 모습을 오늘날의 형사재판제도와 비슷하게 그려낸 것에 있다. 오늘날의 형사재판제도는 시민의 자유, 삼권분립 등으로 대표되는 근대국가가 등장하면서 생긴 것인데, 저승은 애초부터 이승의 현재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승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변화하여 온 것일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하다가 나도 몰래 어이없음에 웃음을 지었다.

봉건사회와 다른 오늘날의 형사재판제도의 핵심은 소추기관과 심판기관의 분리에 있다. 소추는 행정부에 속하는 검사가, 판결은 행정부와 독립된 법원이 담당하는 것이다. 이를 탄핵주의라고 한다.

조선시대를 생각해보자. 고을 수령이 형방을 시켜 죄인을 잡아오게 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직접 판결을 한다. 자신의 행위가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권력이나 권위를 가진 사람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수령 자신이 지목한 죄인을 스스로 재판하면 백퍼센트 유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더구나 모진 고문에 없는 죄도 인정하던 시대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의 형사재판은 소추기관인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면 그 유죄의 모든 입증책임을 검사에게 지운다. 판사로 하여금 무죄일 수도 있다는 조금의 합리적 의심을 들게 해서는 유죄판결을 받아내지 못한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바로 이를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저승재판은 굳이 세속의 탄핵주의를 채용할 필요가 없다. 피고인이 행위에 대한 엄중한 입증책임을 소추기관에게 지울 것도 없이 저승의 거울은 피고인의 이승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각 지옥문의 대왕은 이를 살펴보고 적정한 처단을 하면 될 일이다. 99명의 진범을 놓치지도 않고, 1명의 억울한 피고인도 없는 완벽한 재판인 셈이다.

그러나 이승을 사는 사람과 제도는 언제나 그랬듯 불완전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유와 인권을 갈망한 수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거친 오늘날 형사재판제도보다 더 나은 어떤 제도의 모습을 필자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자유와 인권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 많은 진범을 단죄하고, 억울한 사법피해자는 더 적게 양산되는 방향으로 인도할 것임은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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