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효당(曉堂) 최범술 ②

▲ 생전에 만해 한용운의 회갑 기념수(황금편백) 앞에 선 최범술.

만해 한용운과 교류하며 비밀결사단 ‘만당’ 활동
해인사 주지로 해인대학 설립…제헌 국회의원도
한국 차문화 정립하고 다솔사 차 ‘반야로’ 개발

사천에 녹차가 유명하다. 차밭이라면 상업용으로 전국에 유명한 곳이 많고, 녹차를 전통적으로 덖어내는 곳도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사천에도 차 생산지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중에 다솔사가 유명하다. 그 차를 반야로(般若露)라고 하는데 효당이 개발한 차라고 한다.

그는 다솔사에 있는 차나무를 가꾸고 차잎을 덖어서 민중에게 전승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그의 가계는 녹차와 가까이 했으니 차에 익숙한 그가 후일 차인들과 교류가 활발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차문화』에서 해남 대흥사 응송 박영희와 다솔사 효당 최범술을 우리나라 대표적인 차인으로 꼽는다.

녹차가 있으니, 반드시 차사발이 더불어 있어야 하는데, 유명한 곳이 사천이다. 조선조 막사발의 시원을 사천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하지 않다.

녹차는 중국 윈난성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당나라가 티벳에 전파하면서 차마고도가 생기고, 티벳에서 인도로 넘어가 후일 영국이 인도에서 녹차를 블랙티, 소위 홍차를 생산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삼국사기에 허황후가 차의 씨를 가지고 와서 그 차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말이다. 허황후는 1세기에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 당시에는 인도에 녹차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인도에서 2000년 넘는 차나무가 발견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겠다.

▲ 효당 최범술 선생이 차를 덖어내던 다솔사 가마솥.

오늘날 사천 여러 곳에서 좋은 차와 좋은 차사발을 생산하는 일에 효당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일생을 공간적으로 살펴보는 데는 다솔사를 중심으로 해봄직하다. 만당이라 하여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지라서 그러하고, 김동리 등과 더불어 교육의 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시원지가 다솔사일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만해 한용운의 생활을 전부 책임지면서 그곳을 항일의 근거지로 삼았다. 후일 그는 만해가 광복 전 1944년 6월 입적하자 심우장을 찾아가 그의 유품을 정리하여 보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만당이란 비밀결사단의 목적이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단체의 한계가 될 수 있다는 당시의 상황으로 그는 만당의 해체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인도의 고승 달마바라에게서 받은 진신사리 3과를 범어사에 기증하여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후일 그는 해인대학장을 지냈는데, 비록 불교계의 학교라 할지라도 당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구국의 길임을 직시한 그는 혜안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시 그는 해인사 주지, 국회의원 등을 겸하고 있었다.

효당은 1904년 5월 26일 경주 최씨 이버지 최종호와 광산김 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형이 셋, 누나가 둘, 아래로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서포면 구평리 맘개마을이 그의 출생지이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영환(永煥), 후일에 범술(凡述)로 바꾸었고, 법명은 금봉(錦峯), 중년에는 별호로 석란(石蘭), 만년의 호는 효당(曉堂)이다.

처음에는 서포에 있는 개진학교에 다녔는데, 일본인교사를 배척한 일로 퇴학당하여 곤양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1916년에 졸업했다. 그 후 해인사에서 생활하며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부하다 엄청난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1922년 19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1년간 동경유학생활을 어렵게 마치고 대정대학불교학과를 졸업하였다. 1933년이었다. 이 대정대학이 다솔사의 전설로 내려오는 소신공양으로 등신불이 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 <등신불>에서, 소설 주인공이 다니던 학교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김동리의 작품인 <등신불>은 다양한 문화매체로 재생산되었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득도를 선택하는 소신공양은 독자에게 매우 충격적이다. 살아있는 스님이 가부좌로 앉은 채 머리에 불붙는 화로를 얹어서 죽어가며 득도를 하고, 불이 붙었다가 꺼진 그 일그러진 시체에다 금박을 씌워 그대로 부처님으로 금불각이라는 불당에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

비록 지금은 소설로, 영화로 남아 있으나, 한번쯤 다솔사에서 소설속의 법당인 금불각을 재연해 놓아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어찌 보면, 관광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발상일지는 모르나, 한편으로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심을 일으키는 어떤 형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1979년 입적하였다. 그의 부도는 다솔사에 세웠다.

그의 행적으로 1개월간의 친일행적이 있다. 대처승을 내쳤지만, 그도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효, 의천, 초의 등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으로 불교적인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였고, 항일운동에서도 목숨을 건 엄청난 고난사가 있다.

그는 말한다.

“차를 마실 때, 찻잔을 왼손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찻잔을 잘 잡는다. 두 모금 반 만에 다 마셔야 하며, 마시고 나서 손으로 입술에 묻은 찻잔 부분을 닦은 다음 찻잔을 내려놓고 옷매무새를 살핀다. 그리고 양해를 구한 후 찻잔을 감상하는데, 찻잔의 모양과 색깔을 살피고, 찻잔을 뒤집어 찻잔 만든 사람이나 연대를 살피며 찻잔의 품격을 알아본다.”

※ 최범술 편을 끝으로 [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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