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사천] <노라노:우리 패션사의 시작>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최효안 지음 / 마음산책 / 2017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한결같은 화장과 옷매무새로 매일 7시간 노동하며, 70년 동안 쉬지 않고 현재까지 옷을 만들고 있는 90세의 노라노(본명 노명자) 선생.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다.

방송 기자 출신 최효안이 노라노를 10년간 관찰하고 기록한 이 평전은 ‘여성, 노라노’, ‘아티스트, 노라노’, ‘사업가, 노라노’, ‘아흔의 노라노’, 이렇게 제각기 시선을 달리한 그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어낸, 삶의 결이 다채로운 아흔의 디자이너는 패션 너머 삶의 통찰까지 깊이 있게 전해준다.

1928년 KBS 초대 방송국장인 노창성씨와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였던 이옥경씨의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난 노라노는 경제·문화적으로 굉장한 혜택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19살에 이혼녀이자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된 그녀는 빠른 판단과 추진력으로 194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의상공부를 시작한다. 이후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음에도 전쟁 통의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최초의 패션디자이너로서 활동을 시작한 노라노는 혜택 받은 자의 도덕적 책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고, 개인적 분노를 시대적 소명으로 녹여낸 남다른 배포를 보여주기도 한다.  

반면, 1950년대부터 문화예술계에서 활약하며 미니스커트·판탈롱 등의 유행을 이끌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기성복을 도입했으며, 최근까지도 유명인과 영부인의 고급의상을 맡고 있는 노라노는 업적에 비해 이름이 크게 알려진 편은 아니다. 이는 화려함 이면의 절제된 삶을 즐겼던 그녀의 기질 탓일 것이다. 오랜 기간 권력의 측근에 있었으나, 그 어떤 사건에도 휘말리지 않았던 그녀의 엄격한 자기 관리능력도 같은 맥락의 모습들이다.

격변의 90년을 살아온 노라노는, 한국현대패션계의 살아있는 유물이면서 동시에 변함없는 세련됨으로 오늘도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춰야 남의 비위도 잘 맞춘다는 ‘건달정신’으로, 도전을 즐기되 야망을 품지는 않았던 삶이었다. 끊임없는 성실로 혁신을 이루었던 노라노의 ‘실용적이고 고급스러운’ 90년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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