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 영화포스터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소매치기는 거의 대부분 고독한 도시의 사냥꾼이다. 거리를 홀로누비다가 돈 좀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귀신같은 손놀림으로 지갑을 빼돌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소매치기는 역할이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다. 안테나가 주위를 망보며 살피는 가운데 바람잡이는 목표한 사람의 시선을 돌리며 그 순간에 기술자는 지갑을 빼돌린다. 성공하면 좋지만 들통 났을 때는 동료들이 도망칠 틈을 만들기 위해 방패막이가 나서서칼을 휘두르고 진상짓을 한다.

이 시스템을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놓으면 케이퍼 무비(Caper movie) 혹은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이 된다. 사전적 설명도 ‘무언가를 강탈 또는 절도 행위를 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인데, <오션스 일레븐>이나 <범죄의 재구성>을 연상해보라. 아무튼 소매치기 시스템과 비교를 하자면, 주인공이 멋진 기술로 목표물(최종보스 격인 악당이다)을 털기 위해서 다가설 때, 조역들은 바람잡이가 되어 주위의 시선(사실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 관객들까지 속이는 거다)을 돌리고, 최종보스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새로운 판을 만든다. 이렇게 공식까지 있는 장르인 만큼 공감할 수 있는 적절한 소재만 있으면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조희팔 사건이다.

희대의 사기꾼 조희팔이 아직 살아있단다. 원래 죽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죽었다가 부활한 건지 아니면 몰라도 사람들의 피눈물을 짜낸 돈으로 중국 대륙을 떠돌며 호의호식하며 산단다. 못 잡고 있는 건지 안 잡고 있는 건지도 여전히 모른다. 이 조희팔의 사건을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어 그려낸 영화가 <꾼>이다. 현실과 달리 관객들에게 통쾌한 사이다를 제공해준다는 점만 다르다. 그러나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다른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 정도로 구성과 전개방식이 익숙하기만 하다. 너무나 빤하디 빤한 클리셰만 남발하는 통에 이미 관객은 어떤 놈이 어떤 놈과 편먹고 어떤 짓을 하는지를 다 안다.

케이퍼 무비는 이미 헐리웃에서 공식화한 장르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다. 그러다가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이 등장하면서 웰메이드 케이퍼 무비의 파괴력을 인정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이후에는 모두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다. <꾼>도 장르적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나쁘진 않으나, 모험심이라고는 추호도 없을 만큼 튼튼한 징검다리만 건너고 있으니, 아무래도 기립박수를 받기는 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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