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 영화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가 한창이다. 그러나 ‘영화의 바다’에 빠지는 것은 이미 옛말인건지 그리 뜨겁지는 않다. 제1회 때부터 현장에서 직접 비교한 느낌이 그렇다.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몇몇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혼란스러웠던 탓도 있겠지만, 문화의 소비형태가 많이 바뀐 탓이 가장 클 것이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짧은 시간 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십여 초의 짧은 자투리 시간을 여가로 활용하는 시대에 2시간가량 진득하게 앉아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약간의 결심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같은 영화를 수십 번 씩 보는 사람도 꽤나 많았다. 보고 즐기고 향유할 것이 너무나 많은 요즘 시대의 생각으로 판단하자면 시간낭비로 비칠 수도 있겠다. 뒤집어 말하면 보고 즐기고 향유할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예전에는 최상급의 문화소비재가 바로 영화였다. 그래서 많은 작품을 봤다는 것과 수많은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외우는 것과 영화 한편을 비평가 수준으로 뜯어서 감상할 줄 안다는 것은 최상급의 문화소비재를 가장 완벽하게 즐기는 준거였다.

아무튼 특정영화를 여러 번 본다는 것은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흥미와 재미가 보장되었다는 뜻이며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성도 검증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세상에 그런 영화가 몇 편이나 되겠냐 싶지만 주변에 당당하게 50번, 100번씩 봤다는 말과 함께 거론하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블레이드 러너> 되시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1982년作 말이다.

다다이즘은 구닥다리가 되었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논하는 발터 벤야민의 의견 정도는 너무나 쉽고도 당연하게 이해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시대에 산다. 그러나 복제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대에 복제인간 리플리컨트를 제거하는 직업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전하는 감독의 철학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제작상의 난맥 때문에 발생했던 구멍은 1992년 감독판과 2007년 파이널컷으로 단단하게 메워졌다. 그리하여 <블레이드 러너>의 팬은 빠져나갈 탈출구마저 잃어버렸다.

1982년으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19년, 현실은 그로부터 2년이 모자란 2017년. <블레이드 러너>는 또 다시 30여 년 후를 겨냥한 <블레이드 러너 2049>로 돌아왔다. 원작의 철학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발전시켰다. 덕분에 원작의 팬들은 무릎 꿇고 경배할 경전이 늘어났음에 감동의 눈물이 흐를 뿐이다. 다만 스낵컬처를 즐기는 사람들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박수를 치진 않을 것 같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차분히 감상해줬으면 좋겠다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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