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⑨ 마곡리사건 희생 유가족 강남덕 씨

미군 폭격으로 가족 4명 잃은 강씨
진실규명 애썼으나 ‘불능’ 판정에 실망
진실화해위 재가동 소식에 희망 불씨

▲ 강남덕 씨가 1950년 8월 초 마곡리 미군 폭격 사건의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과 이에 맞선 미국의 강경 대응 발언으로 긴장감이 한껏 치솟았던 한반도. 한때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이른 바 ‘한반도 8월 위기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인식과 공감대가 그 만큼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겐 전쟁의 상흔이 얼마나 크고 아픈지 몸으로 체득한 기억이 아직 뚜렷이 남아 있다. 불과 67년 전 일이다. 아물지 않은 그날의 상처를 오늘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살아가는 이가 적지 않으니, 그 중 한 사람이 사천시 곤명면 마곡마을의 강남덕(84‧전 곤양향교 전교)) 씨다. 그는 1950년 8월 초, 미군 전투기의 폭격과 사격으로 아버지와 누나, 남동생 둘을 잃었다. 오랫동안 정부를 향해 진실규명을 요구해 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숨짓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을 다루며 수년째 알고 지내던 그를 8월 위기설의 끝자락이던 25일 오후, 그의 집에서 다시 만났다.

#노근리사건 접하며 ‘내 문제’ 인식

“죽을 때가 다 돼 가는데도 아직 한을 못 풀고 있으니 이를 우째야겠습니꺼? 보도연맹(희생자 사건) 쪽은 벌써 해결이 돼서 보상(배상)도 받고 하던데. 내는 진실을 밝혀 달라꼬 20년 가까이 소리쳤는데도 아직 답이 없네요.”

강남덕 씨가 1950년 8월 초 마곡리 미군 폭격 사건의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만나자마자 보물처럼 지녔던 각종 문서부터 꺼냈다. 한국전쟁 초기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폭격 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이 1999년 처음 알려진 뒤 진실규명을 촉구하던 자료였다. 강 씨는 이때부터 마을과 가족이 겪었던 참상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며, 더 이상 숨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같은 마을에서 피해를 입은 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그해 11월 ‘마곡리사건 진상규명대책위’를 결성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강 씨의 얘기와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직속기구였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줄여 진실화해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폭격 사건인 마곡리사건은 다음과 같다.

강남덕 씨가 1950년 8월 초 마곡리 미군 폭격 사건의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한 달여 만인 8월 2일. 마곡리 주민들은 인민군의 점령에 들어간 마을과 인근 지역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예상됨에 따라 마곡천 둑방으로 나갔다. 흰옷을 입고 흰 천을 흔들면 민간인으로 알고 폭격하지 않을 것이란 소문을 믿었기 때문이다. 피난길에 오르다 합류한 이들도 함께였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미군 전투기는 손을 흔드는 마을주민과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폭탄 투하는 물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이로 인해 최소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강 씨의 가족 중에는 강 씨보다 세 살 많은 누나와 세 살, 여섯 살 아래 남동생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치명상을 입은 아버지는 이틀 후 숨을 거뒀다. 옆구리에 총상을 입은 어머니는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고,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열 살 아래 남동생도 총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다. 가족 중에는 자신만 멀쩡했다.

#“나만 멀쩡” 살아남은 자의 고통

“나는 그때 집 방문을 안 잠궜다며 심부름을 보내서 살아남았지. 심부름 갔다가 돌아가는데 폭격이 있었거등요. 거리가 그리 안 멀어서 참혹한 모습을 다 봤는데도 당장 못 다가갔어요.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깐. 나중에 덜렁거리는 아버지 팔을 칡넝쿨로 동여 묶고 집으로 모셨던 일이 엊그제 같아요. 지금 같은 의술이면 분명히 살렸을 텐데…”

그는 아버지와 누이, 동생들을 특별한 장례 절차 없이 그냥 묻을 수밖에 없음에 더욱 통곡했다.

“전쟁 통에 관이 어딨어요? 그냥 대나무를 쪼개고 엮어 둘둘 말았지. 그러고는 밤이 돼서야 산에 지고 가서 묻었제. 그때 어찌나 섧고 눈물이 나던지… 그렇다고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라도 살려야 했으니까요. 살아남은 동생도 있고.”

강 씨는 그날의 아픔이 되살아나는 듯 여러 번 눈가를 훔쳤다.

그는 노근리사건이 알려진 뒤로 자신의 억울함도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기에는 마을 차원의 대책위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경남도 대책위와 전국 대책위에 참여하며 다양한 정보를 교류했다. 2001년 6월에는 미국 뉴욕까지 달려가서 ‘코리아 국제전범재판’을 참관했으며, 백악관 앞에서는 진실규명과 사죄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어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특별법제정을 꾸준히 촉구한 끝에 2005년 정부 특별기구인 진실화해위 결성을 이끌어냈다.

▲ 유족회 활동자료를 살피고 있는 강남덕 씨.

그러나 진실화해위는 마곡리사건은 물론,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군에 의해 곤양면 조장리, 서포면 외구리, 곤명면 봉계리 등에서 자행된 민간인 폭격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불능’ 처리했다. 해당 지역에서도 수 명에서 수십 명의 희생자가 각각 발생했음에도 “폭격의 불법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게 진실화해위의 판단이었다.

“정말 말이 안 돼요. 당시 미군 전투기는 우리가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다 알았을 거라. 왜냐면 사전에 정찰 비행도 어느 정도 했고요. 어린 아이와 노인, 여자들이 많다는 걸 눈으로 충분히 확인할 만큼 (전투기가)낮게 날았거든요. 그런데도 폭격을 해버렸으니… 전쟁 중이라 또는 작전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됩니다!”

#재가동 ‘진실화해위’에 거는 기대

진실화해위는 2010년 해당 사건들에 대한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리고는 문을 닫았다. 민간인 희생자 유족을 비롯한 다양한 억울한 사연의 주인공들이 특별법 개정을 통한 위원회 운영 기간 연장을 촉구했음에도 새로이 집권한 이명박 정부가 귀를 닫은 까닭이다. 하지만 강 씨는 최근 다시 꿈을 키우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진실화해위를 재가동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심 신청을 통해 진실 판정을 꼭 받아낸다는 각오다.

진실화해위원회가 2007년에 발행한 정기간행물을 꺼내보며 추억에 잠긴 강 씨.

당시 진실화해위는 ‘폭격 시 민간인 거주지에 대한 숙지와 주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 ‘민간인과 전투원을 식별하는 사전 조치를 소홀히 한 점’을 인정했다. 나아가 “사건 관련 기록 즉, 미군 폭격 기록과 작전지침, 교전지침 등을 충분히 입수‧분석하지 못하여 이들 폭격의 불법성 여부를 규명하지 못했다”고 밝히며,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미국 등이 생산한 사건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데 국가가 노력하기를 권고한 바 있다. 진실화해위 재가동이 강 씨와 같은 억울함을 더 풀어줄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너무 쉽게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엄청 참혹하거든요. 우리 가족이 겪은 비극을 보면 알잖아요.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잘잘못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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