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부용당 영관(芙蓉堂 靈觀) ②

▲ 부용당 선사의 초상화.

지픈개(심포마을)에서 태어나다

부용선사는 오늘날 남양동 심포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포항이 있는 마을이다. 심포의 옛 이름은 ‘지픈개’라고 하는데, ‘지픈’은 ‘깊은’의 사투리이고 개는 포구라는 말이니, 깊은 포구라는 뜻이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하여 논으로 변하였으나, 바다가 깊숙이 마을 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지픈개 즉 깊은 포구라고 하였다.

또한 이 지역은 용천현상이 있는 곳이다. 용천(湧泉)이란 샘물이 솟구쳐 올라오는 현상인데, 이 마을의 용천은 선상지에서 볼 수 있는 습지천이다. 이곳의 용천은, 샘물이 여러 곳에서 솟구쳐 올라와 육지에 있는 샘물만이 아니라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오기도 하는 곳이다. 현재는 이 지역에서 지하수를 워낙 많이 뽑아내는 통에 바다에서 샘물이 솟구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없으나 이 지역의 노인들은 바다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 현상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심포마을에 유명한 ‘개새미’라는 샘이 남아 있는데 이 샘에는 그 현상으로 아직도 미미하게 솟구치는 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새미’라는 말은 포구라는 뜻의 ‘개’와 샘의 사투리 ‘새미’의 합성어로 ‘포구에 붙어있는 샘’이라는 뜻이다. 이 샘에는 수량이 많고 물이 깨끗하여, 수도가 없던 과거에는 마을 부녀자들은 이 개새미에서 물을 길어 빨래도 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러한 작업을 볼 수 없다.

부용선사의 행적에서 집근처에 용이 사는 굴이 있어 물이 용솟음쳐 나왔다는 얘기는 이 개새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샘이 굴처럼 파여져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솟구쳐 나왔으나, 지금은 함석지붕에 시멘트로 조성된 샘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부용선사의 호는 부용당, 법명은 영관, 속명은 원구언(袁九彦)이다. 우리들에게는 부용선사보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서산대사가 더 알려져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부용선사의 기록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은 고행, 신총, 위봉, 지엄, 조우 등 여러 스님들이셨다고 한다. 만년에 사천 고향을 다녀간 후 벽송사에 지엄스님을 찾아가 3년간 배웠으니 지엄스님이 가장 후반에 배운 스승이다. 조선후기 불교계 대표적 승려 부용선사는 심지어 부도조차 아직 확실히 전하지 않고 겨우 연곡사 서쪽에 있는 여러 부도 중 하나일 것이라는 추정만 있다. 이러한 일은, 그가 자기를 드러내는 일은 값어치 없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나 불교계에서 판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계에서는 부용선사는 조선 선불교의 중심 인물이고 조선후기의 선불교 승려들은 모두 그의 후손으로 평가하고 있다. 선사의 제자로 대표적 인물로 서산대사 휴정(1520-1604)과 부휴대사(1543-1615)이다.

▲ 사천시 남양동 심포마을에 있는 마을 공동 우물 ‘개새미’.

‘흔적을 남기지 않을지니…’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 부용선사는 부도에 자신의 이름 새기는 것조차 값어치 없게 여길 만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썼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를 아예 잊어버린다면, 이는 인문학에서도 큰 손실일 뿐 아니라 사천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다.

청허당집에 보면, 부용당의 행적 중 학문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문장이 진실하고 바르며 사물의 이치에는 밝고 똑똑하여 공부하는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았고, 그는 칠요와 구장, 천문, 의술과 중용 장자에 통달하였기에 유학자도 와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매월당 김시습의 제자도 찾아와서 글을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성품이 온아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정이 끊어졌으므로 생각이 오로지 평등하여 한 숟갈의 밥이라도 남을 보면 나누어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유불선 삼교와 천문의술까지 통달하여 폭넓은 교화를 폈다는 논문도 많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부용선사의 구도 방법은 매우 치열하였다. 참선과 면벽, 앉아서 눕지도 않고 벽에 기대지도 않고 가부좌를 하는 수행인 장좌불와(長座不臥)를 9년이나 하였다.

부용선사는 지리산, 덕유산, 금강산 등에서 주로 정진했다. 특히 지리산 지역에서 수행을 많이 하다 보니 그의 자취도 지리산 지역 사찰에 조금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쌍계사 박물관에 있는 ‘부용당진영(芙蓉堂眞影)’이다.

한편, 부용선사가 처음 출가한 곳이 덕이산이라고 했는데 이 산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린 원구언이 13살 어느 가을날 집을 떠나 덕이산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보고, ‘덕이산은 오늘날 덕유산’이라고 발표한 논문이 있으나 의문은 남는다. ‘한 밤중 집을 벗어나 10리쯤 갔을 때 냇가를 만나서 서쪽하늘을 보니 달이지고 있었다’고 하며 ‘새벽녘에 덕이산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으니, 이 산은 당연히 사천에 있는 산이어야지 어째서 몇 백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덕유산이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현재의 지명에 덕이산이라는 산은 사천에서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옛 기록들을 샅샅이 뒤지면 덕이산이 나타나지 않을까? 부용당의 누이도 덕산에 묻혔다고 한 기록이 있으니 덕이산과 덕산은 같은 지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논문에는 사천의 도덕산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

부용의 향기 오래 기억되길

오늘날 큰 사찰에는 고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거나,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귀감을 삼고 있다. 반대로 마땅한 기념물이 없거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여 그 가치를 폄하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러한 속세의 가치를 한낱 티끌보다 못하다고 여긴 품격이 더 고귀하게 평가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천의 위대한 인물이 역사 속에서 혹은 지역문화 속에서 이름이 명멸되거나 흐려지는 일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조선조 불교계의 삼로(三老) 중 한 분으로 추앙받고, 조선조 선종의 종조로 추존 받았던 부용선사가 입적하신지 500년이 지났다. 오늘날 심포마을에는 그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사자후로 제압하였던 용천에는 안내판 하나 설치되지 않아 쓸쓸하지만, 그의 향기는 그래도 그를 기억하려는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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