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부용당 영관(芙蓉堂 靈觀)

조선시대 최고의 승려로 알려진 부용당(芙蓉堂=부용선사). 그의 제자 서산대사는 “나에게 엄격한 아버지 같은 스승”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용당 영관스님은 사천 출신이다. 남양동 심포마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요즈음 전어로 유명한 대포항이 있는 곳이다. 그는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스승이었다. 사명당 유정은 “부용당 영관스님이야말로 조선의 불교를 정립한 위대한 할아버지 스님”이라고 극찬했다. 부용당이 세상을 떠난 후 제자 서산대사는 부용당선사행적(芙蓉堂禪師行績)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 기록을 바탕으로 위대한 선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부용당선사행적-휴정(休靜)

▲ 하동 쌍계사에 전해 내려오는 부용당 선사의 초상화.

「선사는 사천사람이시다. 법명(法名)은 영관(靈觀)이시며 호는 은암선자(隱庵禪子)), 또는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 하셨다. 육신은 이 세상에 머물러도 몸은 늘 서방정토에 있었기에 사람들이 연꽃의 의미로 부용당(芙蓉堂)이라 불렀다.

 스승께서는 1485년 7월 7일에 출생하셨다. 그의 나이 여덟 살 되는 어느 날, 낚시를 가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고기망태를 지고 따라 갔는데, 아버지가 고기를 잡아놓은 망태 속에서 살아있는 고기를 골라 놓아주었다. 아버지가 화를 내어 때리자 엎드려 울면서 “사람이나 물고기나 목숨을 받은 것은 같고 아픔을 느끼는 것도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화를 풀었다 한다.

집근처에 용의 굴 같은 것이 있었는데, 구름 같은 수증기가 난간 밖으로 흘러나오고 음악소리가 들려 나오곤 하였다. 동네 노인들이 이를 두고 ‘용이 연주하는 음악’이라고 했다. 한 번은 스승께서 막대기로 상을 내려치시자 음악이 갑자기 그쳤다. 용이 물 위로 솟아올라 비늘과 갈기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자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스승께서  고개를 들고 한 번 호통 치니 용의 모습은 홀연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기이한 아이라고 불렀다.
 
 하루는 괴이하게 생긴 스님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이 아이는 세상에 뛰어난 보배고 속세에 살 인물이 아니요”라고 말하며 출가를 권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스승께서는 어릴 때부터 돌을 세워 부처님이라 하고 모래를 올리면서 공양이라 하며 소나무를 비스듬히 눕혀 암자라 하고는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꿇어 앉아 있기도 했다. 세상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불교에만 관심이 깊어졌다. 13세 되던 어느 가을날, 스승께서는 숙명인 양 집을 나섰다. 밤 깊어 주위는 고요한데, 마치 누구의 손에 끌리듯 집을 빠져나와 홀린 듯 어떻게 갔는지 10여리를 갔다.

 눈앞에 가로지르는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그제야 집에 기르는 개가 따라온 것을 알고는, 개를 보고 타일렀다.

“나를 따라오지 말고, 돌아가 부모님을 잘 보호하여 드려라. 나는 이제 운수객(雲水客=스님)이 되어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리니 너는 속히 돌아가거라. 그리고 잘 있으라.”

 개는 고개를 수그린 채 스승의 말을 다 듣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몇 번 구슬피 울고는 돌아갔다. 스승께서는 외로운 그림자를 남기며 시내를 건넌 후 고향을 돌아보니 다만 보이는 것은 서녘 하늘아래 산봉우리에 걸려있는 달뿐이었다.

 걸어서 새벽이 되자 곧바로 덕이산(德異山)으로 들어갔다. 고행선자(苦行禪子)를 찾아 가르침을 받은 지 3년 만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17세에 신청법사를 찾아 교강(敎綱)을 탐구하고 위봉대사에서 선의 요체를 터득하였다. 그 뒤 덕유산으로 들어가 손수 암자를 짓고 9년간 장좌불와하였고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몇 년 더 정진하고 다시 9년 묵언정진하였다. 1530년 가을 부모님의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차츰 고향이 가까워지다가 마을에 다다르니 산천은 예와 같았다. 해지는 강마을에 서있는데, 소를 끌고 오는 노인을 만났다. 선사는 절하고 묻기를, “여기가 제가 태어난 곳인데, 제 부모께서 살아계신지 궁금하여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제 아비의 이름은 원연(袁演)이고 저의 어릴 때 이름은 구언(九彦)입니다.”

▲ 부용당 선사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사천시 남양동 심포마을 전경.

노인은 홀연 소고삐를 떨구고 스님의 손을 잡았다. “오늘에야 부자가 만났구나. 그대이름은 내 아들이고 내 이름은 그대 아버지다.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난 지 어언 30년,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고 근심 속에 세월을 보냈는데,  스스로 찾아오니 드디어 내 소원은 이루었구나.” 이들 부자는 서로를 확인한 후 슬픔과 기쁨으로 통곡하였다. 한동안 울고 난 아버지는 그간 사정을 말해주었다.

“네 어머니는 10년 전 세상을 버리고 네 주인은 7년 전 상처를 했고 너의 전답과 집은 남아있다.” “누이동생은 어디있습니까?” “네가 떠난 날 저녁부터 문 닫고 눕고 개 역시 해만 바라보고 앉아 있더니 7일 만에 모두 죽어 덕산 서쪽에 묻었다.”

선사는 이 말을 듣고 삶의 덧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생각하며 눈물지었다. 저물녘 동네에 이르니 옛날 함께 뛰놀던 뭇 아이들은 모두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들과 함께 평상에 둘러앉아 밤새워 얘기하느라 날이 밝는 줄 몰랐다. 이튿날 아침, 옛 주인을 뵈니 주인은 놀라 “그대가 참으로 구언이란 말인가?”라고 하고 자신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렸다.

“미천한 몸이 주인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등졌으니 그 죄 하늘인들 용납하리까. 이제 전택을 모두 바치고 천한 신분서 벗어나 집을 떠나 불도를 닦음으로써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주인이 어떻게 은혜를 갚는가라고 반문하자, “집을 떠나 도를 닦는 사람은 세속을 피하여 자신의 의지를 실천에 옮기고 속세의 모습을 바꾸어 자신의 목표에 이르는 것입니다.”(중략) 선사는 집문서와 땅문서를 바쳐 헌납한 다음 아버지와 작별하고 지리산으로 가서 지엄대서 벽송의 문을 두드렸다. 선사가 지엄대사를 스승으로 모신 지 3년 만에 지엄대사는 세상을 떠났다.(중략) 선사는 유불선의 학문에 매우 심오하게 깨우쳐 어느 학문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전에 선비들이 넘쳐났으며 영호남 일대에 유불도에 통달한 사람이 많아지게 된 연유도 선사에게서 비롯되었다. ‘향나무를 옮겨 심으면 다른 나무들도 향내가 난다’고 한 옛말은 이런 경우를 지칭한 말일 것이다.

어느 스님이 명상에 대하여 물었다. 선사께서 답하시기를, “천 생각, 만 걱정에 내 마음의 왕을 잃게 된다. 마음의 왕이란 말이 끊어지고, 마음이 사라진 자리이다(言語道斷心行處滅). 이름(名)은 말의 길이고 형체(相)란 마음의 처소이다. 팔만대장경으로도 거두어 담을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의 경계이고 3천의 옛 부처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초월한 선법(禪法)이다. 만일 마음가짐을 허공처럼 한다면 도에 조금 더 가까워 질 것이다.”

 선사께서는 벽송의 문을 밟은 뒤 황룡산에 머물다가 팔공사에 주석하고 대승동, 의신동, 연곡동을 왕래하며 41년의 세월을 꿈결처럼 보낸 뒤 1571년 4월 14일 열반에 드셨다. 세속으로 87세 법랍 72하(夏)였다. 연곡의 서편 산록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

다음은 1577년에 쓴 휴정의 시.

높이 깨달음의 자리에 앉아 먼저 세 가지 수레를 이끌어주시네
그물 벌리고 바다로 들어가 많은 고기를 건졌도다.
쇠몽둥이로 부수노니 호랑이굴 마귀의 집이어라
사람 가니 세상 적막하고 달 지니 하늘이 비었구나.

            高踏覺地 先引三車
            張羅八海 携摝群魚
            金搥擊碎 虎穴魔宮
            人亡世寂 月落天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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