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항공국가산단 조성에 즈음한 특별기고

▲ 선진리성과 통양리 전경. 사진 왼쪽에 선진항과 선진리성이 보이고, 그 오른쪽이 사천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과 토성이다. 가운데 보이는 들판은 간석지로서 예전엔 바다로 추정된다. 들판 위 오른쪽으로 보이는 마을이 통양마을이다.간석지 들판과 통양마을 오른쪽 대부분이 경남항공국가산단에 포함된다. 산단 조성에 앞서 통양포와 통양창지의 흔적을 찾는 일이 시급하다.

우주에는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변화가 짧은 시간에 이뤄지든, 아니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변하지 않는다고 믿을 만큼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이뤄지든, 결국은 변한다는 얘기다. 지형이나 지명도 세월 따라 변함은 마찬가지다.

고려 12조창 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은 지금부터 1000여 년 전에 용현면 통양리 일대에 설치되어 조선 태종 4년(1404)까지 존속하다가 없어진 조창지(漕倉址)이다.

그런데 지난 4월 27일 최종 승인된 경남항공국가산업단지 조성사업의 사업예정지(82만㎡)에 ‘통양포’ 추정지역이 포함되면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개발에 묻혀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통양포와 통양창지의 위치라도 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통양창 설치 이전의 상황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무역량도 비약적으로 성장해 신라의 경제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야기되었다.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을 보면 사천 남해안에서도 해상로를 통한 대중외교(對中外交)가 활발히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심이 바로 통양포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 편을 보면 “청주를 설치하고 복세를 총관으로 삼다(685년)”는 대목이 있다. 청주는 지방행정조직 9주 중의 한 주며, 이후 강주를 거쳐 진주(940년)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청주총관 복세(福世)는 진주 소(蘇)씨인데, 당시 진주를 중심으로 대를 이어 권세를 누리던 호족 가문이다.

또 한국사(신편, 국사편찬위원회, 1994)에는 “강주에서도 해상세력이 대두했다. 왕봉규(王逢規)는 경명왕 8년(924년)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로서 후당(後唐)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중략) 왕봉규의 대중외교는 당시의 정세로 보아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해상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왕봉규의 해상무역은 통양포를 통해 이뤄졌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선진리성 축성과 신라고비(新羅古碑)
경남문화재연구원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실시한 사천 선진리성 공원화사업지구 내 발굴조사에 따르면, 선진리성은 왜성 이전부터 통일신라시대 토성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토기편과 축조수법 등에 비춰 축성 시기는 9세기 즈음이다.

이 성은 조창의 주요시설 요소인 선박, 선창, 성곽, 마을 중의 하나로 강주(진주) 도독 등의 호족들은 통양포구에 성곽을 쌓아 사병을 주둔시키고 해상활동을 꾀하여 그 세력을 유지하는데 활용하였으리라 본다.

2004년 6월 조명군총 주차장 부지 내 발굴조사 과정에서 통일신라의 비석편이 출토되었다. 이 비석편에는 총관(總管)이나 내말(乃末) 등의 관직이 보이고 있어 신라시대에 제작된 비석으로 판단되었고 추후에 비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무주신자(武周新字)가 확인되었다.
이 비석은 혜공왕 대(765~780년)에 제작된 것으로 비석의 제작배경은 무주신자나 향도(香徒), 그리고 요언대덕(了言大德) 등으로 미루어 보아 혜공왕 대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불교에 의지하여 만회하고자 결사한 조직 구성원들, 즉 승려를 비롯하여 지방관들도 다수 포함된 향도가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 고비의 발견으로 경주의 고관이나 지방관, 승려, 향도 등이 이곳 통양포를 드나들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려시대 13조창을 나타낸 지도.

#12조창의 전신인 60포창(浦倉)
조창제 이전에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연안과 한강 연안을 중심으로 60개의 포(浦)를 설치하여 이를 연결하는 형태로 조운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들 포는 하나의 촌락으로서 군현의 하부 행정 기구였다. 그러나 992년(성종 11)의 주부군현(州府郡縣) 및 관역강포(館驛江浦)에 대한 명칭 개정과 조운선(漕運船)을 통해 개경의 경창으로 운반하는 비용인 수경가(輸京價) 등이 정해지면서 60포제에서 조창제로 바뀌었다.

고려사 권79 조운조에 의하면 고려초기의 조운은 60개의 포(浦)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포는 단순히 조세를 싣고 내리는 포구가 아니라 관(關)․역(驛)․강(江)과 함께 행정구역의 성격을 띠는 군현의 하부 구조인 동시에 지방의 조세 집결지였다.

통양창의 전신은 통조포(通潮浦)라는 포창(浦倉)으로, 그 전의 명칭은 말조포(末潮浦)로 되어 있던 곳이다. 수경가(輸京價, 조운을 위탁한 군현이 지불하던 조선 사용료)는 5석에 1석이었다.

#통양포의 위치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에 “통양포는 현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는 기록, 성종 11년 임진년에 편찬한 동사강목에 “사주는 지금의 사천이다. 통양창은 사주 통조포에 있었고 전에는 말조포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통양포는 사천현의 20리 지점에 있고...” 등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통양마을의 아래쪽이 농지로 되었으나 야산의 산록연접지역까지 바다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말의 목태림(1782∼1840년)이 쓴 동성부(東城賦)에는 ‘통양과 조금(助今)’이라는 촌명(村名)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통양마을과 조금마을은 조선후기까지 상당히 번성하였던 곳으로 여겨지고 이 일대가 현에서 20리 지점으로 통양포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양창의 설치
고려사 권79 조운조에는 “국초(國初)에 남도(南道)의 주군(州郡)에 12창(倉)을 설치하였는데, 충주(忠州)의 덕흥창(德興倉), 원주(原州)의 흥원창(興元倉), 아주(牙州)의 하양창(河陽倉), 부성(富城)의 영풍창(永豐倉), 보안(保安)의 안흥창(安興倉), 임피(臨陂)의 진성창(鎭城倉), 나주(羅州)의 해릉창(海陵倉), 영광(靈光)의 부용창(芙蓉倉), 영암(靈巖)의 장흥창(長興倉), 승주(昇州)의 해룡창(海龍倉), 사주(泗州)의 통양창(通陽倉), 합포(合浦)의 석두창(石頭倉)이 그것이다. 또 서해도에 안란창(安瀾倉)을 설치하였는데, 창에는 판관(判官)을 두어 각 고을의 조세(租稅)를 각각 부근의 창에 운송하였다가 이듬해 2월 조운(漕運)하되, 가까운 곳은 4월까지 기한하고 먼 곳은 5월까지 기한하여 모두 경창(京倉)에 운송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국초는 고려초의 의미로, 대체로 태조~성종 시기를 뜻한다.

고려건국 초기에 마련된 초기의 조운제도는 60포창제의 형태로 유지되다가 성종 11년(992년) 통양, 석두, 해룡, 장흥, 해릉, 부용, 진성, 하양 등 9개 조창의 수경가가 정하여져 기틀을 잡았다가 중앙과 지방의 제도가 정비되는 성종 14년(995년) 무렵에 12조창제로 자리 잡았다고 보고 있다.

성종 11년 수경가 제정 시기에 통양창이 포함되어 있음은 당시 통양창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사주 통양창’이라 하여 ‘사주’가 표기된 것을 두고 의아하게 여길 수 있다. 사주는 성종 이후인 현종 즉위 6년(1015년)에 사수현을 승격해 이름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사가 쓰인 시점이 조선 세종대임을 감안하면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사천과 사천만.

#조창의 구조와 관리(官吏)
고려시대의 조창은 조세의 1차수집기관인 동시에 군현과 유사한 독자적인 행정구역이었다. 따라서 창고 소재지를 중심으로 몇 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세를 수집․보관․선적․운송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리(聖堂里)에 설치한 조창(漕倉)인 성당창의 경우 배를 댈 수 있는 포구를 비롯하여 운송된 조세를 계량하여 수납하는 넓은 마당(창마당, 창뜰)과 수납한 조세를 보관하는 창고시설, 판관과 색리가 머무는 공간(봉세청) 등이 마련되어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고려시대 조창 역시 이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었으리라 본다.

각 창에는 외관(外官)인 판관(判官)이 파견되어 조창 운영과 함께 색전(色典), 초공(梢工), 수수(水手), 잡인(雜人) 등을 감독 관리하였다. 이 중 색전은 향리에 해당하였고, 초공이나 수수, 잡인 등은 조창민(漕倉民)에 해당하였다.

판관과 색전의 임무가 주로 행정적인 것이었다면 조운선의 운항과 관리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은 초공(梢工)에게 있었다. 초공은 수수(水手)․잡부(雜夫)들과 함께 창에 소속된 주민이었으며, 그들을 지휘하여 배를 운항한 조운선의 선장이었다. 이외에도 조운선에는 노를 젓는 수수와 조세를 싣거나 내리는 잡부가 승선하였다.

초마선 1척당 초공 12명, 수수와 잡부 20명으로 총 32명이 승선하였다. 조창 당 초마선 6척이 출항하면 약 200명이 동원 되었다.

#통양창의 수세(收稅) 지역
통양창에 조세를 납부한 군현은 낙남정맥 남서쪽의 사주, 하동, 고성, 남해 등과 낙동강 서쪽의 남강과 황강 수계에 위치한 진주, 협주(陜州) 관내 지역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사천, 진주, 하동, 산청, 함양, 거창, 협주(합천), 의령, 고성, 통영, 거제, 남해, 마산시의 진전, 진북, 진동 일대이다.

통양창과 가까운 진주 등 인근지역은 육운(陸運)이 가능하였고, 협주(陜州) 관내의 북부지역은 황강, 낙동강과 남강을 이용하여 진주까지 운송한 후 진주에서 사천으로 넘어와 통양창에 조세를 납부하였을 것이다. 해안 군현인 고성현이나 남해현은 선박으로 운송하였다. 진주에서 사천으로 넘어오는 길은 대동여지도를 통해 볼 때 망진산의 좌측에서 사천 팔음산, 천금산 우측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곡의 운송은 당연히 바닷길을 이용했다. 조운선은 먼 거리 바닷길을 항해하기 때문에 1년 1회 운항이 원칙이었다. 국가 재정원인 세곡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 계절풍을 이용해야 하였다. 우리나라는 1년 중 6, 7, 8월은 풍고(風高)라 하여 풍파가 심하여 선박의 운항이 어려웠고, 파도가 일지 않고 행선이 적합한 시기는 풍화(風和)라 하여 2월에서 5월 사이였다. 따라서 조운선의 운항은 이때에 맞추었다. 세곡은 11~12월에 거두어 일단 조창에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2월부터 수송을 시작하였다. 가까운 곳일 경우는 4월까지, 먼 곳은 5월까지 경창으로 운송을 마쳤다.

#통양창의 위치 추정
먼저 통양창의 위치에 대하여 여러 사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조 - “통양창성은 현의 남쪽 17리 지점에 있고 토축으로 둘레가 3086척이다. 옛날에 수세를 한 곳이다.”

동국여지지 사천현 고적조 - “통양포는 현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옛 통양창은 현의 남쪽 17리이고 통양포 상(上)에 있다. 고려 초에 설치하여 부근 주현(州縣)의 조세를 거두어 개경으로 조운하였으니, 즉 12조창 중의 하나로 지금도 둘레 3086척의 토성의 터가 남아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성종 11년 - “사주는 지금의 사천이다. 통양창은 사주 통조포에 있었고 전에는 말조포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통양포는 사천현의 20리 지점에 있고 통양창의 옛터는 사천현 남쪽 17리 지점에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천현 창고조 - “통양창은 고려 12조창 중의 하나로 창성은 현의 남쪽 17리에 있고 토축으로 둘레가 3086척이다. 선조 정유년에 왜의 석만자가 점거한 곳이다.”

이밖에 사천현여지승람 고적조, 해동지도 사천현 등에 통양창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위에 언급된 내용과 유사하다.

위의 사료들에서 통양창은 사천현의 17리 지점임을 알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상의 1리가 540m이므로 현에서 9.18㎞ 지점인 현재의 선진리성 안에 통양창이 있었다고 본다.
2002년 발굴조사 시, 선진리성의 남문지에서 남서쪽으로 50m 정도가 통양창지라고 추정했다.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 지표상에 많은 양의 기와가 채집되었고 지형이 평탄하여 건물을 축조하기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에서 통양창지와 관련한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사 시 폐와지 1개소, 주거지 2개소, 주혈 등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통양리 현지 주민인 신○○(1954년생) 씨에 의하면 옛날 노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통양리 364번지 인근(조금마을의 북쪽 구릉지)에 창고터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사료에 기록된 17리와 다소 거리가 있는 성싶다.

▲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선진리토성. 통양창성은 이곳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양포와 통양창성 흔적 찾아야
조운(漕運)이란 고려~조선시대 국가에서 수운(水運)을 활용하여 세곡(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 운송하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조운은 수운과 육운(陸運)을 겸하기도 하지만 주로 선박을 이용한 수운이 중심을 이뤘다.

통양창은 고려시대 경상도 사주(泗州)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으로, 기록에 의하면 사천현 남쪽 20리 지점에 통양포가 있었고 그 부근에 통양창이 있었다. 통양포는 현재의 사천시 용현면 통양리 일대로, 선진마을까지 합하여 통양포라고 지칭한 것 같다.

통양포는 통일신라시대 강주도독 등 지방호족이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시기부터 해상교통이 활발한 포구로 발전하여 60포창 중의 하나였고, 그 후 수경가가 정하여진 성종 11년(992년)에 9조창에 통양창이 포함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개경의 관리 조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양창에서는 경남도 서부지역인 사천, 진주, 하동, 산청, 함양, 거창, 합천, 의령, 고성, 통영, 거제, 남해, 창원시의 진전, 진북, 진동 일대의 세곡을 11~12월 중에 수납하여 이듬해 2월부터 5월까지 예성강 입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경상도 조선의 침몰사고가 잦으면서 철폐되었으며 그 후의 세곡은 육운(陸運)으로 납부되었다.

▲ 조영규 사천시문화관광해설사

참고로 조선 후기 현종 원년(1660년) 축동면 구호리에 설치된 장암창과 100년 뒤 1760년에 축동면 가산리에 가산창이 설치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통양창을 구호리로 옮겼다고 오해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 태종3년 이후 현종 원년까지 257년간 육운으로 하던 조세 운송을 다시 해운으로 하기 위하여 새로이 구호리에 장암창을 설치하였고 그 장암창을 가산리로 옮긴 게 가산창이다.

여러 사료에 의하면 현에서 남쪽으로 17리 지점인 현재의 선진리성 내에 통양창이 설치되어 있었고, 통양포는 20리 지점으로 선진리성에서 3리 떨어진 곳인 지금의 통양, 조금마을에 있었다고 판단되며, 통양리 일대가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전에 통양포를 비롯하여 역사성을 지닌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조사하고 밝혀서 후대의 교육 자료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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