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 영화포스터.

아버지가 죽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어린 소녀가 킬러로 자라고 국가의 비밀조직을 위해 일한다. 10년간 충성을 바치면 자유를 주겠다고 하는데 그녀는 과연 원하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마치 <니키타>를 연상케 하는 영화가 드디어 관객 앞에 다가왔으니, 칸 영화제에 진출했다는 <악녀>가 그 아성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판에서 여자는 액션을 못 한다는 속설이 있다. <본 시리즈>처럼 남성 액션은 대충 손으로 치고 박아도 어느 정도 느낌이 살아나지만, 여성의 액션은 컷과 컷을 이어붙이는 노고를 더해도 살짝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 때문에 대체로 칼이 난무하고 피가 사정없이 튀어야 장면이 산다. 그래서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이후에 우리나라의 여성 액션영화는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고야 말았다.

무려 15년이라는 세월을 묵히고 마침내 여성 원톱의 액션영화가 등장했으니, 김옥빈 주연의 <악녀>는 액션이라는 측면에서는 정말 오랜 시간 기다린 보람이 있다. FPS 게임이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게 특히나 편하게 다가올 1인칭 시점의 액션은 참신하고도 스타일리쉬한데, 속된 말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게다가 몇몇 시퀀스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게 전부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수는 있으나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야기마저 훌륭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 감독은 액션만 신경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러티브가 엉망이다. 평소에 구상해왔던 멋진 장면을 화면으로 구현해냈으니 내 할 일은 다했다고 뻗어버린 건지, 화려한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를 억지 이야기로 얼기설기 엮어낸 느낌이다. 결정적으로 제발 그 강을 건너지 말라(公無渡河歌)던 아내의 애절한 외침을 외면하던 백수광부(白首狂夫)처럼, 이노무 영화는 끝내 사랑타령을 해대고 말았다. 여성이 주인공이면 사랑과 모정을 빼고서는 소재가 없고 전개가 안 되나? 웃음으로 시작해서 감동으로 마무리한다는 코미디영화의 전형적인 공식처럼, 이것도 거의 강박수준이다.

칸 영화제에서 <악녀>가 5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보도가 쏟아졌는데, 어지간히 엉망인 작품이 아닌 이상 상영이 끝나면 대부분 박수를 쳐준다. 심지어 야유와 함께 박수를 치기도 한다. 물론 감동이 컸다면 그 시간은 길다. 이는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의 노고에 대한 답례의 성격이니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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