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세종대왕 ②

‘사천은 남해안 전략 요충지’ 인식
축성신도 제작해 성의 규격화 시도
사천읍성 복원 필수…미니어처라도

세종대왕 시기에 쌓은 사천읍성. 지금은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복원이 시급하다.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다. 예로부터 각 지역에 성을 많이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들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의 성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사천에는 곤양읍성과 사천읍성이 대표라 할 수 있다. 곤양읍성은 고려공민왕19년 1370년에 사천읍성은 세종대왕27년 1445년에 축성되었다. 곤양읍성은 진주읍성보다 먼저 축성되었다.

읍성이라고 하면 자칫 오늘날 시·군·읍의 행정단위로 생각할 수 있으나, 과거 우리나라 성은 왕이 거주하던 도성, 지방행정과 군사를 관리하던 읍성(castle), 군인들이 거주하던 산성(fortress), 국경경계지역의 행성 등으로 구분되었다. 여기서는 세종대왕과 연관된 내용만 언급하고 있으니 사천읍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흔히, 성을 성곽이라고 하는데 이를 엄격히 말하면 성(城)과 곽(郭)으로 구분된다. 성은 내성(內城)이며 곽은 외성(外城)이다. 성곽에는 성벽이 있고 성문이 있고, 성곽 주위에 해자라고 하는 외부침입을 막는 장애물이 있다. 상세히 말하면, 성문도 아무 장애물 없이 통과하는 성문이 있고, 성문을 쉽게 통과하지 못하도록 성문 앞에 반원으로 빙 둘러싸는 벽을 가지고 있는 옹성도 있다. 성벽에는 배수로인 누조가 있고, 성벽 맨 위에는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여장이라는 것이 있다. 성벽의 일부분을 밖으로 돌출시켜 적을 공격하기에 효과적인 치가 있다.

서울의 성문은 대문, 지방의 성문은 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동대문·서대문·남대문 등이 있었는데, 동쪽은 인(仁 ), 서쪽은 의(義), 남쪽은 예(禮)의 덕목을 가졌기 때문에 동대문을 숭인문, 서대문은 숭의문 남대문을 숭례문이라 하였다. 오늘날 사천읍에 있는 읍성도 이 기준으로 동쪽에 선인리 서쪽에 정의리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남쪽은 평례문에서 평의 글자를 가져와서 평화리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도성 주위 500리 바깥에 다시 성을 쌓고 이를 곽이라 하였다. 500리 안쪽을 기(畿)라 하였다. 서울을 경(京)이라하니 서울 주변을 경기(京畿)라 불렀다. 그러나 500리를 돌로 성을 쌓을 수 없어 그 둘레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높은 지형을 선택하여 곽의 성문이라하였는데 이를 관이라고 불렀다. 관은 성의 문과 합하여 관문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동쪽의 관문을 대관령이라 하며 그 동쪽을 관동 혹은 영동이라 하고 남쪽의 관문을 조령이라 하며, 그 남쪽을 영남이라 부른다.

세종대왕은 사천이 외침을 막기에 주요한 지역이라 생각하고 세종27년, 1445년에 사천읍성을 축성하였다. 2년 뒤 9월에는 사천진을 설치하였다. 세종대왕에게 사천은 남해안을 경계하고 보호하는 주요지역으로, 자신의 태가 안치된 매우 소중한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양성지에게 명하여 축성신도를 작성하라 명하였는데, 축성신도(築城新圖)는 성을 쌓는 설계도였다. 세종대왕 이전에는 각 지역에서 성을 쌓는 군사들 마음대로 성벽을 축성하였기에 통일성이 없었는데 이 설계도대로 성을 쌓게 된 이후 규격화된 석재와 목재들로 조선 팔도에 동일한 규격의 성들을 쌓을 수 있었다. 축성신도는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일부 기록에 의하면, 성벽을 쌓을 때 위의 돌의 규격은 가로세로 한 자라고 한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없애기 위해 우리나라의 성을 허물어버리자 성벽을 쌓았던 돌들을 주민들이 많이 가져가서 집에 담을 쌓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한다. 사천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어릴 때 중학교 수업을 마치면 읍성(그때는 산성이라 불렀다)에서 놀기도 하였는데 선인동 마을 담장들의 돌들이 네모반듯한 것들로 쌓여진 것을 보고 신기해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돌들이 무너진 사천읍성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판단된다.

사천의 읍성은 선인동과 정의동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경상도속찬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신석조의 객관기 등의 자료를 살펴보면, 사천읍성은, 성벽의 둘레는 3000여척 혹은 5000여척이란 기록이 있고, 높이는 11척 정도, 여장이 580개, 옹성을 가진 성문이 셋이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척도가 주척, 황조척, 영조척, 포백척 등이 있었는데 1자의 길이가 각기 달랐다. 자칫 1자를 오늘날 30센티라고 측정하면 문제가 생긴다. 성을 쌓거나 제방을 조성한 토목에서는 주척을 사용하는데 주척 1자는 겨우 20센티를 넘는다. 황조척과 영조척은 30센티 정도된다. 포백척은 1자가 40센티가 넘는다.

그러나 지금은 옛 읍성의 위용이 사라지고 이상한 돌무더기로 성처럼 둘러져 있을 뿐이고 새로 축조되는 성벽은 여장도 없고 누조도 없고 규격화된 돌이 아니라 마음대로 쌓아놓은 담이 있을 뿐이다. 19세기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천읍성이 공격을 받았는데, 그 당시 고성군수 오횡묵이 사천읍성에 와서 보고 기록한 내용을 보면 읍성의 건물과 지형들이 제법 상세하다.
 
후세의 우리는 사천읍성을 완전히 복원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더듬어 보고 읍성을 다시 기록하고, 섬세하게 사천읍성 미니어처라도 만들어 놓고 사천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역사관을 심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세종대왕이 애써 노력하여 축성한 사천읍성이 오늘날 우리의 무관심 속의 역사로 스러져가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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