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 영화 포스터.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단행됐던 1998년 당시, 우리나라 대중문화예술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호들갑이었다. 해적판을 통해서 일찌감치 일본문화를 접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일본의 대중문화에 잠식될 것이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전 세계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등이 무차별로 수입된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웠을까. 결론적으로 불법 비디오로 볼 사람은 이미 다 봤다는 것이 함정이어서 실제로는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만 수혜를 입었다.

고백하자면 마모루 오시이 감독의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도 불법 비디오로 먼저 봤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 일본영화와 애니메이션과 만화도 은밀하게 나돌던 해적판으로 미리 접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다만 몰래 숨어서 봐야만 하는 상황이 싫어서 비판적 수용을 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공각기동대>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이렇게나 높은 수준의 철학적 사유라니 이게 말이나 되냐며, 당시에 공부하듯 함께 봤던 이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이런 애니메이션이 실사영화로 만들어졌다.

원작의 명장면을 실사로 구현해냈다는 점에서는 별풍선 백만 개를 던져도 아깝지 않다.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인 것은 흥행을 고려한 헐리웃 제작시스템 상 고심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다. 시대의 아이콘 격 배우니까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기대는 무참하게 배신당했다. 그냥 잘 빠진 SF 영화를 한 편 봤다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나, 20여 년 전 마음 설레면서 지켜보던 원작이 있지 않은가.

마모루 오시이의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이보그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탄생한 기계에 영혼이 깃들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사유가 핵심이건만, 헐리웃 판 <공각기동대>는 누구나 찬탄할 만한 명장면만 고스란히 카피하더니 원작의 정수(精髓)는 무겁다는 이유로 내팽개쳐버렸다. 혹자는 1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된 만큼 흥행요소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방패병 역할도 하더라만, 그렇다면 <매트릭스>는 제작비가 적게 들어서 그런 철학적 사유를 녹여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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