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로 격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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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로 격상시키다
  • 이은식 문학박사(경남문화재 전문위원)
  • 승인 2017.03.13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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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사천을 빛낸 인물] 고려 현종 ②

사주 격상 연도는 1012년? 아니면 1015년?
지방행정 기반 닦고 외세와는 화친 펴
사주천년 계기 역사문화의 도시로 도약해야
 

▲ 학촌마을에 그려진 고려 현종 관련 그림. 어린 나이의 현종이 훗날 왕이 될 것을 암시해 지었다는 시가 적혀 있다.

고려 8대 왕 현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 이름은 왕순(王詢)이다. 992년 7월 1일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현종을 낳자 바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왕욱은 그때 사천에 귀양 왔다. 왕순도 2살 때부터 왕명에 의해 사천으로 보내져 아버지와 같이 살았다. 비록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가끔 만나서 부자의 정을 나누고 살았다.

아버지와 같이 한 기간은 비록 4년이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와 같이 했던 추억이 평생에 남았고, 사천도 그만큼 애틋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남았다. 사천에서 개성으로 돌아간 그에게는 어디든 힘들고 외로운 타향이었다. 심지어 왕에 등극했을 때에도 거란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수선하여 현종은 피난을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개국 초기라서 백성들은 국가나 왕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부족하였다. 그래서 그의 피난길을 막고 위협하기도 하고 왕을 조롱하기도 하는 지역 세력가들이 많았다.

이러한 수모를 겪은 현종에게는 어린 시절에 따뜻하고 다정하게 지냈던 사천이 절절히 그리웠다. 그 후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진정되자 사천에 살 때 도와주었던 사천사람들을 특별히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사수현(泗水縣)을 사주(泗州)로 격상시켰다. 신하들은 사주를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불렀는데, 그만큼 현종의 사천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사수현이 사주로 승격되기에는 조건이 적합하지 않았지만 사주는 조선 태종 때까지 주(州)로서 지방행정의 격을 높이고 있었다.

현종은 매우 영민하였던 모양이다. 정치력도 대단하였던지 고려수도 개성을 수도로서의 격조를 갖추고, 지방행정도 기반을 닦았다. 특히 외세와 화친을 주도하여 극동 아시아 지역에 평화가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드문 전쟁이 없는 시대가 왔던 것이다.

현종이 사수현을 사주로 격상시킨 연도가 언제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기록이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1012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절요에는 1015년으로 되어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모두 국가기록 정사이므로 어느 것이 맞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볼 것이라 생각한다.

현종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왕이 되고자 마음의 다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정동면 배방사에서 살 때 지은 시가 전해져 오는데 이를 보면 엿볼 수 있다.
 
조그마한 어린 뱀이 약 난간 있네
(小小蛇兒 繞藥欄)
온 몸 붉은 무늬 알록달록
(滿身紅錦自斑爛)
늘 꽃 숲에만 있다고 말하지 마라
(莫言長在花林下)
하루 만에 용이 되는 일 어렵지 않다네
(一日成龍也不難)

대여섯 어린 나이에 이런 시가 가능한가? 용은 왕을 상징하므로 이런 시는 역모를 암시하는 것인데 감히 이런 글을 지을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떠오를만하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가 어리더라도 한시를 지은 경우는 역사에 자주 나온다. 조선시대 김시습은 다섯 살 때에 세종대왕 앞에 나아가서 한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당시 김시습을 오세신동이라 불렀다. 어린 왕순이 지은 노래도 정말 자신이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훗날 누군가 칠언절구의 형식으로 손질해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 왕욱이 죽도록 아들이 왕이 되도록 노력했으니 그 영향으로 이러한 내용의 노래는 충분히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 노래를 그 때 지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시의 내용이다. 이 시는 참요(讖謠)다. 앞으로 일어날 정치적 상황을 예언하는 노래를 참요라고 하는데, 이 내용은 앞으로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암시가 아닌가? 당시 정치적 상황은 천추태후가 호시탐탐 왕순을 노리고 있는데 굳이 역모의 모습을 이렇게 드러내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사천은 사주천년으로 역사문화의 도시로 도약하려고 한다. 사천의 많은 인물이 역사 속에서 환하게 빛내고 명멸해 갔지만 사천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제라도 책 속에 덮여 있던 우리 어른들을 모셔내는 사천의 모습은 매우 고무적이다.

▲ 학촌마을 벽화에 등장한 현종. 하지만 면류관이나 복식의 색상 등에서 고려 황제의 그것과 차이가 난다.

정동면 대산마을, 학촌마을, 사남면 능화마을에는 현종에 대한 벽화가 많이 그려져 있다. 부자상봉길에는 기념물도 조성되어 있다. 비록 이 그림과 기념물이 수정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우선 이렇게라도 시작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40세에 아깝게 세상을 떠난 현종이 그렇게 사랑하던 사천에서 이렇게 살아나고 있다.

문화는 정치와 별개의 영역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모두 독립적이고 상보적이다.
현종은 개성을 고려의 수도로 잘 다듬었던 인물이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도 안종으로 높여 사천에 있던 묘를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과 사천을 자매도시로 추진하는 일은 어떠한가?
사천이 역사문화면에서 통일을 앞서가면 어떠할까?

<고려현종 ③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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