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③ 故 박재삼 시인의 미망인 김정립 씨

선구동 처녀, 박 시인과 선을 보다
“손만 보고 ‘사람은 착하겠다’ 생각”
“신혼여행 못 가고 50대에 첫 여행”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뉴스사천= 하병주 기자] 이 시는 삼천포가 낳은 故 박재삼(朴在森) 시인의 ‘아득하면 되리라’란 작품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천년의 바람>에 실렸다. 사랑하는 그 누군가와의 거리가 저토록 아득할진대, 20년 전 떠난 그가 남은 가족과 세상을 향해 품은 그 아득함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난 박 시인은 삼천포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찌든 가난으로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지만 그의 문학을 향한 열정은 꺾이지 않아 순수서정 시인으로 현대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바다가 많이 등장하는데, 삼천포 앞바다가 큰 영향을 끼쳤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천포를 노래한 박재삼’으로 그를 기억한다. 지금도 노산공원에 오르면 그의 시 ‘천년의 바람’을 바위에 새긴 시비와 박 시인의 문학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재삼문학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전국의 문학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 박재삼을 기억하는 이들은 안타깝게도 점점 줄고 있다. 이는 우리 사천시민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천, 삼천포가 낳은 시인을, 나아가 삼천포를 노래한 시인을 지역민들이 몰라주면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이는 너무도 빤한 이치다.

▲ 고 박재삼 시인의 미망인 김정립 씨가 자택에서 오래전 추억들을 풀어놓고 있다.

그런데 최근 한 가지 반가운 소식에 귀가 뜨인다. 현재 충남 공주시에 있는 박 시인의 묘를 사천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지역 문인들 사이에 조금씩 움트는 모양이다. 마침 몇몇 문인들이 박 시인의 미망인인 김정립(81) 씨를 찾아가 의견을 여쭌다기에 지난 1월 24일 서울로 동행했다. 김 씨는 남편의 묘를 삼천포로 옮기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크게 반겼다. 나아가 박 시인과의 아련한 옛 추억들도 조용히 더듬었다.

“삼천포로 모실 수 있다면 정말 좋죠. 그 동안 선생님(=박 시인)을 삼천포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모두 말뿐이었어요. 그래서 이젠 포기하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죠. 우리 애들도 모두 좋아할 겁니다.”

거실 벽 박 시인의 사진과 함께 단아한 모습으로 일행을 맞은 김정립 씨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지난 시간, 박 시인의 묘지 이장을 두고 문학인들이나 고향 사람들이 여러 번 제안했던 일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말로만 그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도 얼핏 보였다. 이어 박 시인의 묘지가 지금의 공주시 어느 곳으로 정해진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박 시인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묘지를 공주로 해달라는 특별한 유언은 없었어요. 다만 ‘고향에 가고 싶긴 한데 삼천포는 너무 멀다. 애들 다니기가 힘들 거니까 그냥 서울 근교로 하자’ 이러셨죠. 그런데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나 봐요. 공주에 강경훈 씨를 만나러 갔다가 그 분한테 ‘여기 너무 좋네요. 나 묻힐 땅 좀 줄 수 없어요?’ 하고 물었고, 그때 그분이 ‘당연히 드리죠’ 했던가 봐요. 그러고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정신이 없을 때, 강경훈 씨가 연락이 와서는 공주로 모시겠다고 해서 이렇게 된 거죠.”

사실 1997년 6월 8일 박 시인이 타계했을 당시 사천에서도 박 시인을 삼천포로 모셔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상황에서 일 진행이 더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박 시인의 묘를 삼천포로 옮길 수 있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는 유족들의 뜻이 확인된 셈이다.

▲ 김정립 씨의 집 인터폰에 붙은 고 박재삼 시인의 사진. 박 시인의 숨결이 아직 머문 듯하다.

민감하고 조심스런 주제가 끝났으니 옛 추억을 더듬는 쪽으로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갔다. 박 시인의 미망인 김 씨는 가끔 남편과 고향을 찾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향에 내려오면 금방 불려 나가셨죠. 술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으셨죠. 술집 말고 즐겨 가시는 곳은 노산공원이었어요. 거길 제일 좋아했어요. 젊어서도 노산공원에 붙어 살며 시상을 떠올리고 그러셨대요. 팔포 쪽도 좋아하시고.”

▲ 박재삼문학관에 있는 박재삼 시인 동상.

추억은 더 옛날로 향했다. 김 씨는 박 시인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태어나 살던 곳은 선구동이었죠. 1962년 어느 날, 이웃 어느 집에서 나를 찾는다고 해서 갔는데 마루에 낯선 사내가 서너 명 있더라고요. 거기 선생님(=박 시인)이 계셨던가 봐요. 뒤에 알고 보니 선을 보려고 나를 불렀던 것인데, 그렇게 잠시 보고는 밤에 아버지를 찾아와 딸을 달라고 한 거죠. 나는 부끄러워 얼굴은 못 보고 손만 쳐다봤는데 꼭 여자 손 같더라고요. ‘사람은 착하겠다’ 이렇게 생각했죠. 아버지가 처음엔 망설였지만 같이 온 사람들 권유에 허락을 했어요.”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러나 찌든 가난은 그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나 보다.

“너무 가난하게 살다보니 그땐 삶에 지쳤던 것 같다. 신혼여행도 못 갔는데, 50대에 들어서야 어디 가고 싶은 곳 없냐고 물어 처음 여행을 갔다. 지금이야 좀 나은 편인데, 선생님은 그런 것도 못 누리고…”

그는 말끝을 흐렸다.

이날 김 씨를 찾은 일행은 김경 시인, 안채영 시인, 시민 김학록 씨 등이다. 미망인 김 씨는 이들에게 박 시인이 생전에 받았던 상패와 기념패 등 유품 여러 점을 맡기며 박재삼문학관에 전달되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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