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재발견-6. '트랜스크리틱' 되기

자신이 서 있던 일상의 자리를 떠나 낯섦과 마주치게 하는 경험, 그 낯섦이 익숙함으로 돌아올 때 우린 다시 낯선 일상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삶과 터전을 낯선 무엇으로 성찰해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게 하는 것, 이것이 '명상' 또는 '여행'이 가진 참다운 가치가 아닐까?

Shambhala 인용
명상은 잡념, 망상을 멈추고 아랫배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을 지켜보는 가장 원시적인 숨쉬기 운동이다. 하지만 이 원시적인 행위를 통해 우린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무한한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다.

여기서 에고와 고통의 발생 원인에 대한 "초캄 트룽파" 스님의 지적을 인용해 본다.

"맨 밑바탕에 '그냥 열려 있는 공간', '원초적 밝음'이 있습니다. '기본 바탕' 이지요. 그것이 참된 우리(眞我)입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텅 비어 있어서 아무리 춤을 추고 돌아다녀도 걸려 넘어질 위험이 없는 무도장과 같지요. 우리가 바로 그 공간입니다. 그것과 우리는 하나예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늘 그렇게만 있다면, 혼동이 어디서 오고 어디서 공간이 사라지며 무슨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 열린 공간에서 너무 지나치게 움직였을 뿐입니다. 텅 빈 공간이다 보니 거기서 춤추고 싶은 충동이 일게 마련인데, 그런데 우리의 춤이 너무 격렬해져서 공간이 거기 있음을 나타내기에 필요한 만큼보다 더 많이 몸을 회전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의식을 가지고 '내가 공간 안에서 춤을 추고 있다' 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때부터 공간은 더 이상 이전의 공간이 아닙니다. 굳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도 공간과 하나인 몸으로 존재하는 대신 공간을 우리와 동떨어진 실체로,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원성 경험이지요.

나와 공간이 따로 있어, 내가 공간 안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고정되고 동떨어진 공간이 춤추고 있는 나를 감싸고 있는 거예요. 이원성은 '공간'과 '나'를 의미합니다. 공간과 하나인 나는 더 이상 없지요. 이것이 '꼴(色)'의 탄생이요, '남(他)'의 탄생입니다."[초캄 트룽파의 마음공부. p,166]

Shambhala 인용
원숭이의 격렬한 춤의 속도를 늦추고 '열린 공간'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호흡)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 이로서 '전광석화'와 같은 잡념과 망상을 안정시키고 자연, 열린 공간의 에너지 파동과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지리산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가 텐트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녹녹치 않다. 이미 강고하게 형성된 에고(내부)를 넘어, 열린 공간(외부)의 자리를 확보한다는 것은 '극한의 도약'없인 불가능하다. 우리의 눈은 '눈 자체'를 바라볼 수 없듯이 에고의 자기 동일성, 나르시시즘으로 무장된 내부의 시선은 결국 거울의 공범성에 불과하다.

방법은 오직 하나, 외부가 내부에게 말을 걸게 하는 것, 소리 내어 울림으로서 내부가 그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달려있다.
극한까지 자신을 내몰 때, 명상시 다리 저림의 고통이나 불안 ․ 망상을 극복해 낼 때, 자신의 보금자리, 정체성의 껍질로 살았던 내부가 극한의 움직임에 의해 얇아지고 '틈'이 생겼을 때, 비로소 외부의 소리, 바깥의 빛을 우린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보호막이 떨어져 없어질 쯤 내부와 외부의 이분법은 사라지고 '극한의 도약' 이후에 확보된 안정된 공간, 열린 무도회장에서 탱고를 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문제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얼마나 극한까지 내 몰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죽지 않을 정도면 되겠지!!!

내부를 떠나온 명상 여행은 우리에게 외부의 자리, 즉 자연의 자리를 확보케 한다. 절대 잊혀 지지 않는 경험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건, 세속의 일상적 삶이다.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세속의 자리, 문화의 자리로 회귀한다. 그런데 이 자연의 자리를 경험한 사람은 문화의 자리가 조금씩 낯설다라는 느낌을 받기 시작한다.

강고한 철옹성 같았던 자신의 인식이 전부가 아님을 서서히 느끼기, 깨닫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됨"(Be in the world, not of the world)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때부터 '경계인', 내안의 이방인이 되는 건지 모른다.

문화와 자연의 사이에서, 내부와 외부의 사이에서, 생성과 구조의 사이에서 두 위치를 끊임없이 횡단하고 이동하는 존재, 가라타니 고진(일본의 비평가)식으로 표현하면 "초월론적 자리"(transcendental position) 또는 "트랜스크리틱"(Transcritique)이라 명할 수 있다.

'초월론적 자리'는 뭔가 안정된 제3의 입장이 아니다. 명상의 입장에서 세속을, 세속의 입장에서 명상의 자리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연결 접속하는 무한한 생성, 변화의 자리이다.

이 자리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우리 '신체의 살갗'이 아니던가?

시민기자는 1년 전부터 진주에 있는 "위빠사나 명상공동체" 인 "아침고요산방"에서 법우들과 일과를 마친 목요일 저녁에 명상수행을 해오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힘들진 않다. 우선 내 몸이 너무 좋아하고 있고 정말 강력한 뽕을 한 대 맞는 기분이다.
하지만 난 늘 명상 그 이후 즉, 세속적 일상에 더 많은 애착이 가는 것을 보면 항상 낮고 낮은 하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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