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과 주권의식의 문제

1. 머리말

 이 글의 제목을 원래대로 사천시의 지방분권과 자치라고 적었다면 읽는 이는 분명히 필요하니까 읽어야 하는 많은 정보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를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재미있게 풍자하는 것이 진지한 글쓰기의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시도가 다시 처음부터 라고 생각하게 하거나 무언가 새로운 시각을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은 의미 전달의 절반은 성공하면서 글읽기에 이르게 할 수도 있겠다.

 분명히 사천시는 정체성을 갖춘 자치기관이지만 항상 절반의 성공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삼천포로 통학하고 있고 사천으로 출근하고 있으며 시장이 사천사람이 되거나 삼천포 사람이 되거나 되어야 한다는 문제에 있어서 항상 진지하고 때로는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포블 리가 진지하게 칠천포로 이름 짓자고 했을 때 황당하면서도 통쾌한 기분은 아마도 희극을 보면서 밀려드는 카타르시스로서 공감되었을 것 같다.
 여기서 진지하게 칠천포를 고민하는 것은 어깃장으로 느껴질 수 있겠으나 그 이름에 녹아든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칠천포를 내포하고 사천시를 상정한 것이다.

 두 개의 전통이 하나의 용광로에 녹아들 때에 우리는 그 긍정적 결과와 부정적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다양성이 줄 수 있는 활력과 비상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고, 그 결과물이 제대로 응집되지 않을 때의 불미스러움과 불화를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내어놓을 것이 없는 잔치나 혹은 내어놓을 마음이 없는 잔치에 참석해 본다면 그 잔치가 얼마나 약소할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자명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문제제기에 들어가 봄직하다.
 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보다는 개선의 방향이 있는 공간의 확보가 중요하다.
 누가 그 이익을 차지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금언은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2. 문제제기

 잔치 중에서는 혼인잔치가 아마도 가장 즐거운 잔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혼인 당사자가, 혹은 그 가문들이 이 혼인을 즐거워하는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 혼인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 불편한 혼인잔치가 될지, 흥겨운 잔치판이 될 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일 것이라 생각된다.
 잘 살고자 다짐하고 출발하는 부부에게 마저도 때로는 큰 불행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두 가문의 의지의 문제인데, 출발부터 한 쪽이 접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자손이 누구 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이었으리라.

 이왕지사 성과 이름이 지어지고 나면 바꾸기는 험난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매번 터지는 누구 밥상의 밥과 국이 될 것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누구 몫이 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면 밥상도 차려지기 전에 숟가락 젓가락 소리만 요란해 질뿐이라는 점이다.

 이혼 후를 항상 생각하는 부부이거나, 자기 부모 생각밖에 못하는 부부의 생활사가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게 될 것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고서도 뻔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살면 되고, 나는 돈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바보라면 나처럼 살면 될 것이다. 이 방편은 부모님 일찍 여의고 시끌벅적한 처남 버티고 있는 반 처가살이 하면서 수확기 마다 당연한 노력봉사하고 있는 자신이 몸에 익힌, 편하게 사는 방편 중의 하나이나 적극 추천하기는 힘들다.

 그냥 재산이라는 것을 하나도 안 만들고 마눌님 하늘같이 모시고 전 재산 만 얼마쯤으로도 아무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을 누구에게 추천 하겠는가 만서도, 실은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배짱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문제제기는 누구의 몫으로 더 많이 가지려는 가가 아니라, 사는 동안 얼마나 가치 있는 일과 행복한 성과를 맺을 수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3. 현실파악하기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정치인은 현실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자 노력하는 편이고, 서민들은 그런 정치인들을 안주삼아 술잔 들이키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자기가 뽑고서도 항상 자기가 뽑았던 이유는 잊어먹고 세상 푸념 다 들이 엎어서 북어 씹듯이 뜯어보지만 그러면서도 항상 어르신으로 모시고 있다. 방정맞은 마음에 다 엎어서 소환하자고도 나서보지만 그렇다고 대안은 없다. 왜 대안이 없을까?

 이 말이 또 나오게 된다. 누구 몫이 먼저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으니 대안이 자리 잡을 구석이 없는 것이다. 빵을 만들고자 모였는데 밀가루가 아깝고, 남의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 같은 마음을 가지면 빵이 나오겠는가, 밥도 마찬가지 국도 마찬가지, 갖은 양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깃장 통합의 부정적인 요소이다. 
 우리 앞바다에서는 생선이 많이 나오니까 이번 식사에 생선을 걱정마이소~.
올해 감도 풍년, 쌀도 풍년인데 밥이랑 과일은 책임지겠소이다~.
 이렇게 나온다면 통합의 가장 긍정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 풍경이 보여지려면 우선 그 잔치의 모습이 정말 생생하게 마음속에서 그려져야 할 수 있다.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어구가 거의 진리처럼 회자되었는데, 이 생생한 미래의 비젼을 시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의 핵심은 지역 지도자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느냐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중대한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철만 되면 오히려 얄팍한 이기심과 지역구도를 조장하지 않으면 지도층이 될 수 없는 이런 구도를 현실이라고 파악하는 것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4. 긴 것과 아닌 것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지칭할 때에 쓰는 토속어이다.
 긴 거는 긴기고 아닌 것은 아닌기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긴 것은 좋고 유리하고, 짧은 것은 나쁘고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왜 짧아서 불리하게 되고 길어서 유리하게 되는가?
 자기 밥상에 올릴 물건만 건져 올리고자 하니까 긴 것이 유리하게 되고 유리하지 않은 것은 나쁘고 불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자기 집에 긴 막대기 밖에 없다면 짧은 것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쓸 것인가.
막대기야 자르면 된다지만, 작은 사발, 작은 신발, 작은 옷은 어떻게 할 것인가.

 원래 아버지가 물려준 성씨 때문에 놀림받는 아이는 성씨도 바꿔주는 세상이다.
 이미 지은 이름 때문에 불화가 자꾸 생긴 다면 이름마저도 바꿔줄 수 있어야 한다.

 길어야 긴 것이 아니고 그것이 순리이고 해결책이라면 그것이 기기 때문에 기다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아닌 것이지만 자기 것이기 때문에 긴 것이라고 인정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남이 아닌 내 식구과 되었음에도 여전히 길고 짧은 것으로 다투다 보면은 잔치상이 아니고 진흙탕에서 뒹굴어야 하는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융화되는 세상을 위해서는 그런 세상을 생생히 그려내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라고 믿고 뽑아주었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채찍질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미래상은 무엇인가?
누군가가 세뇌시켜서 이루어지는 상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미래상인 것이다.

5. 다시 머리말

 우리가 뽑은 시의회가 공회전을 하고 있고, 시장님도 지역눈치를 많이 살펴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문제는 손가락질 하는 것이 쉽더라도 책임을 지는 것은 힘든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클 수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만큼 현명하지는 못하다.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측에서 겁이 나서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사회라면 희망이 없는 사회이다. 언제나 문제가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지만, 처음 머리말과 다음 머리말이 똑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 아니라, 돌고 돌아 더 높이 상승하는 것이 동력이 있는 회전이다.
성장동력, 성장동력하지만 성장과 동력이 항상 따로 노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성장 속에서 더 큰 동력은 움이 트고 열매를 맺을 계절을 기다린다.

 이런 성장의 열매를 거저먹는 사람은 웬 떡이냐 하겠지만, 누군가의 피땀 없이 정말 소중한 것이 성취되었던 적은 없다.
 사천과 삼천포가 하나 되는 데에 칠천포가 필요하다면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름만 바뀐다고 거저 바뀌는 것도 없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을 가끔은 하지만, 휘영청 허드러진 그 멋진 자태에도 이유가 있고 노력이 있다. 그리고 긍지가 있다.
 그 긍지가 올바른 정체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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