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 터널 영화 포스터 ⓒ쇼박스(주)

한 남자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다 터널이 붕괴되는 바람에 그 안에 갇힌다. 이 남자는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생존한 채로 터널에 갇혔다면 당연히 살아 돌아가야 한다가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역사를 한번 접고 두 번 접은 급속 성장 앞에서 경제논리는 인간보다 우선한다. 계산기를 두드린 숫자 앞에서 사람 목숨은 파충류와 동급이 되고, 생존자의 유일한 신호인 배터리 한 칸은 특종 경쟁에 밀리고, 촌각을 다투는 순간에도 높은 분들과의 사진 한 장은 생존자의 시간 위에 존재한다.

영화는 이런 아이러니를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코미디라는 자조 섞인 촌평이 나온다. 재난 영화의 후유증은 그것이 근간의 현실을 반영할 때 감상의 여파가 더 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누구나 떠올리는 그 사건들 생각에 보는 내내 부끄럽고 심장이 아프다.

단 한 명의 라이언 일병을 포기하면 더 많은 생명이 희생되지 않을 수 있고 경제적 부담도 훨씬 적어진다. 그러나 그 한 명을 구하고자 나섰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보장 받는다. 하지만 대한민국 땅에 사는 우리는 그 시스템 자체를 믿지 않는다. 올바르게 기능하는 꼴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기 때문이다. 대체 뭘 잘못한 건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내가 왜?”를 외치는 영화 속의 누군가처럼. 그래서 우리는 현실의 잠수사나 영화의 소방장과 같이 조직이 아니라 사명감 있는 조직의 구성원의 영웅적 희생에 기댈 수밖에 없다. 다만 어처구니없게도 그 조직이 오히려 영웅들에게 책임을 묻기 바쁘다는 것이 함정.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치유되지 않는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장애를 호전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웃이 외면하는 이 세태는 난감함을 넘어서 절망적이다. 기나긴 상처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나 있기는 할까.

영화가 주는 여운이 현실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상기시키는 역할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블랙코미디라고 잠시 웃고 넘어가기에는 그때의 상처가 너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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