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물 위를 걷는다. 그 뒤로 또 한 마리의 나비가 따라 걷는다. 물을 건너면 산이 나오고 우뚝한 산봉우리를 넘어 마침내 고향에 닿는다. 고향으로 이르는 길은 험난했지만 영상은 더없이 아름답고 포근하다. 영화 <귀향>은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일 줄 알았더니 Spirits' Homecoming, 넋이 되어 고향 땅을 밟는 鬼鄕이었다.

‘위안부’를 소재로 한 귀향을 지켜보는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어깨는 저절로 처지고 죄지은 심정처럼 두근거린다. ‘위안부’라는 말을 열고 닫는 작은따옴표는 마치 마음의 감옥처럼 느껴진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이 마음의 감옥은 더 견고해질 것이나, 이 부채감을 위로하듯 영화는 따스하게 말을 건넨다.

거창의 한디기골에서 평범하게 살던 초경도 지나지 않은 열네 살 순박한 소녀는, 힘없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죄로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조선의 어린 소녀가 무려 20여만 명이며 이 중에 살아 돌아온 사람은 고작 238명, 이제 생존해 계신 분은 불과 44명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그 동안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영화제작에 반대하고 불편해하던 일본 우익보다 더 우익 같던 한국인들이 많아 아주 놀랐다던 조정래 감독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개봉 후에도 애국심 마케팅이라는 비방이 영화를 칭찬하는 것만큼이나 떠돈다. <귀향>은 흔히 애국심 마케팅이라고 입에 오르내리던 일부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있다. 이것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며, 인권에 관한 이야기이며,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이며, 약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독재자 신격화 사업에 1900억 원을 퍼부으면서 20만 명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이들에 대한 목숨 값으로 5만 원이 가당키나 한가.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전범재판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를 털고 일어나겠다는 그 의지가 부럽기만 하다. 사리사욕을 위한 독함은 버려야 마땅하지만, 독함의 명분이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관한 것이면 더욱 독하게 쫓아가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끝이 난다. 영화건 소설이건 그림이건 가능하면 여러 매체가 나서서 덤벼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디 이 영화를 눈물 나도록 마음 아픈 영화로만 끝내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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