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반응하는 것, 얼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삶에서 불확실한 것, 삶의 불확실함 자체에 대한 각성을 의미한다.

이는 레비나스의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자면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각성, 따라서 나 자신의 불확실함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다른 이들의 불확실한 삶의 의미를 추정하는 것일 수는 없다. 그것은 타자의 불확실함에 대한 이해여아 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얼굴은 윤리의 영역에 속한다.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불확실한 삶>>, 2008, 경성대학교출판부, 184쪽.

미국의 유명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의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이, 그가 가장 최근에 쓴 『투게더』보다 10년 전에 쓰였단 사실은, 한 학자가 자신의 관심을 장기적으로 견지하며 이론을 구축해간다는 것의 ‘경이’를 새삼 상기시킨다. 한 주제를 평생을 두고 연구하는 세넷처럼 나 역시 10년, 30년 후에 한 주제에 깊은 성찰과 통찰을 가진 사람이 되는, 그런 꿈을 꾸곤 한다. 세넷의 이 책에서는 불평등, 협력, 존중, 장인 등의 그의 일관된 관심사가 등장하는데, 이후에 쓰인 『장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 『투게더』 등의 책은 이 관심사들이 심화된 책이었다.

계급 불평등에 대해 다룬 『불평등 사회의 인간 존중』에서 특별히 내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터뷰 방법론에 대한 그의 통찰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연구의 기술적 방법론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관계에 대한 성찰로 나아간다. 세넷은 이 책에서, 그가 초보 학생일 때는 미처 알 수 없던 방법론에 대한 어떤 통찰이 이후 시간이 흐른 뒤에 왔다고 쓰고 있다. 사물이나 동물이 아닌,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에서 자신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는 ‘자기 참조적 이해’라는 ‘오류’는, 초보 연구자가 빠지기 쉬운 위험한 함정이다. 주관적 입장과 관점이 배제된, 객관적 관점에 충실해야 할 연구 과정이지만, 연구자라는 개인 역시 결국 한 명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세넷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상대에 자신을 투사하는 연구과정에서의 ‘오류’는 때로는 그 연구를 망치기보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그 상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냉정히 객관화하기보다, 마치 자기 자신인 듯 서로를 혼돈할 때 상대를 더 잘 알 수 있기도 한다. 그 사람이 되어볼 때,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되며, 결속력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럴 때의 오류란, 매력적인 ‘오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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