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사천정명 600주년의 행사도 그랬지만 ‘사주천년, 화합의 나래를 펴다’라는 올해의 와룡문화제도 그랬다. 지역 향토사에 대한 기본소양 없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워, 낯선 지역 향토사에 관한 관심도 또한 높아짐을 느낀다.

역사시대의 여명기 초기철기시대, 史勿(사물)이라는 작은 나라였다가 통일신라 경덕왕에 이르러 泗水縣(사수현)으로 편제, 9주의 하나인 강주(康州)의 속현이 되고 고려시대 현종6년 현종의 아버지 왕욱과의 애틋한 유년의 기억이 서린 유배지, 泗水를 왕이 된 다음, 豊沛(풍패)의 땅이라 하여 큰 고을의 의미로 泗州로 승격시켰다. 그때가 1015년이니 지금으로부터 꼭 천 년 전의 일이다. 조선시대 3대 태종 13년 전국단위의 행정체제와 명칭을 개혁하며 사주가 사천으로 변경되니 향토사는 ‘풍패지향의 강등’으로 기록한다.

고려사적 입장에서 강등이겠으나 조선사적 관점에서 보면 유구한 지명 600주년이다. 관점에 따른 평가는 논외로 두고 현대사에 들여다보자. 1956년 사천군에서 삼천포 읍과 남양면을 합해 삼천포가 시로 승격 분리된다. 이후 40년 동안 삼천포 시는 해양문화 중심으로 발전해 왔고 사천군은 농경중심과 산업배후지로 성장해오다가 1995년 도농복합도시로 다시 합쳐진다. 짧은 40년의 분리 경험이지만 유구한 역사로 볼 때 한 가지의 동일체라는 데에는 변함없다.

인문적 화제(話題)인 와룡문화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어쨌거나 해양의 기반 위에 성장한 한려문화제, 농경의 기반위에 성장한 수양문화제는 행정통합과 맞물려 융합의 도가니에 부어 녹이니 지금의 와룡문화제이다.

사천의 주산(主山) 와룡산, 천 년 전 고려의 8대임금의 잠룡기의 전설을 안고 이름 지어진 와룡은 지정적인 면에서나 정신적으로나 화합의 양 경계를 품고 있는 역사의 편린이다. 통합을 기념하여 제정한 날이 시민의 날이고 그날이 5월 10일이니 와룡문화제는 참으로 가치 있는 때에 열리는 제전이다. 풍패지향의 선민(選民)적 가치는 이질적 문화의 양 지역을 화합하도록 하는 향토애의 공통의 뿌리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까지에 이르는 뱃길 삼천리(三千里)가 오늘에 지명으로 남은 흔적으로서의 삼천포는 통양창과 더불어 결코 우연이 아닌 역사다.

국민적 자긍심이 애국을 낳게 하고 향토사의 긍지가 향토 사랑을 낳는다. 향토애가 없는 공동체의식은 뿌리 약한 나무이다. 내 고장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와 역사적 가치를 이야기로 엮어 온전히 이해한다면 당연 향토애 또한 높아진다는 말씀이다. 사천문화원의 ‘사주승격 1000년 학술세미나’나 진주박물관의 ‘사천 유물’ 특별전은 사천인문학의 르네상스를 예고하는 서막으로 여겨 본다. 

화합은 조화이다. 이질적 요소를 상호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의 하모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코러스를 빚어내듯 2천년 넘게 이어온  史勿(사물)의 이두(吏讀) 속에 녹아있는 노(魯), 니구산(尼丘山), 사수(泗水)의 DNA라 할 수 있는 (孔子)의 인의예지신의 정신이 평생학습도시 사천의  사천인문학으로 꽃 피길 조심스레 기대한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