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의 오르페우스(Orphée 1865)

그리스 신화 중 콜 키스의 공주 메데이아는, 금양모피를 지키는 용을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의 약을 이아손에게 주어, 그가 금양모피를 구하고 고향 테살리아로 돌아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금양모피를 구하기 위한 이아손의 모험에 함께 한 아르고호 원정대(Argonauts)의 일원이었던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상과 지옥에서 두 번이나 잃은 후 비탄에 잠겨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이었는지 또는 아폴로와 너무 가까운 까닭인지는 몰라도 그는 디오니소스 축제 때 흥분한 여성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사지가 절단되었다. 강에 버려진 그의 머리와 리라는 떠내려 가면서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모로의 오르페우스(Orpheus)는 그렇게 죽은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거둔 트라키아 처녀의 표정을 통해 그의 기괴한 죽음과 죽음의 고통 그리고 그에 대한 트라키아 여인의 그리움의 분위기 등을 환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는 건축가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모로는 프랑소와 에두아르 피코(François-Édouard Picot)의 살롱에서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 친구이자 스승인 테오도르 샤세리우(Théodore Chassériau)를 만나게 된다. 모로는 샤세리우와 만남을 통해 샤세리우가 매혹되었던 드라크루와(Eugène Delacroix)와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의 영향을 동시에 받게 되었는데 그의 세밀하고 정교한 밑그림은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출발하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의 주제인 오르페우스는 모로를 시작으로 세기말의 상징주의를 매혹한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로에게서 음악을 배운 음악의 창시자인 동시에 신비주의 종교의 사제였다. 그의 죽음은 예술가의 자기 희생 혹은 예언자의 순교로 해석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오르페우스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모로 역시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두고 이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로의 예술적 경향에 대해 상징주의(Symbolism)라는 표현을 쓰는데 상징주의자들은 리얼리즘이 그리는 사물의 단순 명백한 사실을 넘어 사물이 가진 이면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무릇 예술가는 이러한 특별한 통찰력을 지닌 사람만이 가능하며 따라서 예술가는 사물에게 내재되어 있는 신의 뜻을 이해하는 예언자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상징주의 화가들은 스스로를 히브리어의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Nabis)라고 불렀는데 상징주의 화가들을 특별히 ‘나비 파’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로가 그린 화면은 매우 정교하기로 유명하다. 화면에 서 있는 트라키아 여성의 모습은 섬세한 무늬로 짜인 옷감으로 치장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보석 장신구를 걸치고 있다. 이것은 모로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서 그림의 표면 자체를 보석이 박힌 듯한 마티에르(matière - 질감)를 보여주기 위해 물감을 덧칠하는 임파스토와 심지어 캔버스를 긁고 문지르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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