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쏘니에의 프랑스군대 (1814,Campagne de France-1864)

메쏘니에의 프랑스군대 (1814,Campagne de France-1864)
Napoléon Bonaparte(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군인으로서의 나폴레옹과 황제로서의 나폴레옹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도 제법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군인 나폴레옹은 위대한 승리의 대명사로 알고 있지만 그에게도 뼈아픈 패배의 기록은 있다. 그가 직접 지휘관으로써 지휘한 전투 횟수는 약 60~70번 정도였는데 그 중 패배한 전투는 대개 9~11번 정도로 알려져 있다.(물론 이견이 많음)

그림은 라옹의 전투에서 패퇴하는 장면이다. 나폴레옹 체제의 몰락 속도를 가중시켰던 이 전투(1814년 Battle of Laon)는 프러시아 연합군과의 싸움이었는데 프랑스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전투였다. 이 전투의 패배는 이전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더불어 나폴레옹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전환점에 있는 전투였고, 따라서 이 그림은 한 영웅의 몰락을 춥고 을씨년스럽고 어두운 풍경을 배경으로 패배한 전투에서 돌아오는 장면을 상상하여(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864년) 그린 것이다.

Jean-Louis-Ernest Meissonier(쟝-루이-에르네스트메쏘니에)는 나폴레옹 전문화가로 유명하다. 본업은 조각가였지만 역사화가, 특히 군사화가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작업은 비교적 작은 캔버스에 매우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그림 역시 가로 76Cm, 세로 51Cm안에 매우 정교한 솜씨로 눈 녹은 황톳길을 행진하는 상대적으로 많은 군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앞쪽의 나폴레옹이 탄 말과 그의 부장들 모습은 사진처럼 선명하고 예리하게 묘사되어 있다.

염료 사업을 하던 메쏘니에의 아버지는 메쏘니에가 자신의 사업을 계승하기 바랐지만 학교에 들어간 메쏘니에는 색채의 사용에서뿐만 아니라 스케치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자 화가로서 삶을 인정하게 된다. 그는 17살 되던 해 로마상(Prix de Rome) 2등에 입상하여 유명한 역사화가였던 Léon Cogniet(레옹코니에) 스튜디오에 입학을 허가 받게 된다. 30대가 된 메쏘니에는 역사적 장면을 묘사하는 화가로써 당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특히 그의 화풍과 묘사대상이 17세기 네덜란드의 유명한 역사화가 GabriëlMetsu(가브리엘메츄)와 닮아 그를 프랑스의 메츄로 불리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해는 1804년이었다. 그 뒤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이 전투의 패배로 1814년 실각하여 엘베섬으로 유배된다. 하지만 1815년 2월 엘베섬을 탈출하여 3월에 다시 황제의 자리에 복귀하지만 이미 그의 시대는 가고 있었으며 100일 뒤, 영국의 웰링턴이 지휘하는 연합함대에게 워털루에서 참패하여 대서양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죽게 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10년의 짧은 황제 재위기간 동안 매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역법(曆法–달력)의 통일과 미터법의 제정, 법전의 제정 등은 오늘날 프랑스가 있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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