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와룡문화제 변천사>

선진리성에서 열렸던 와룡문화제.
와룡문화제가 올해로 20회째다. 통합사천시 출범이 20년 만이니 그와 나이가 같은 셈이다. 그러나 우리지역 문화제의 역사가 그것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천군과 삼천포시로 나뉘어 있을 때도 문화예술의 향기는 끊이지 않았다. 당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 고유의 문화적 특색을 지키고 계승하려는 문화예술인들의 노력은 각별했고, 그 노력은 사천수양제와 한려문화제를 낳았다. 와룡문화제의 전신이다. 초기 문화제를 이끈 원로를 직접 만나 지나온 문화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싶었으나 시간 제약으로 그러지 못하고, 대신 사천시사에 실려 있는 내용을 축약해 옛 시간을 더듬는다.

1949년 진주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가 시발이 되어 밀양 아랑제, 진해 군항제, 김해 가락문화제 등 지자체별로 문화제가 줄을 이었다. 사천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문화제가 시작됐는데, 1958년 10월 옛 사천군에서 제1회 사천문화제의 막이 올랐다. 이 행사는 용남고등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故 최동수 씨가 주축이 돼 구성한 사천문화제추진위원회가 주최했다.

사천문화제가 잉태되기까지 지역 문인들이 애를 썼다. 사천지역에서는 1952년 4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고장에서 향토의 재건과 문화진작을 도모하려는 사천지역 청년들이 수양문학동지회를 결성하고 문화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동인지 <조개>를 2집까지 발간했다. 이어 1956년에는 최동수, 최영의, 장태현 등이 중심이 되어 수양문학동지회의 후신으로 수양문화연구회를 새로 발족했으며 향토지 <수양>을 발간해 지역문화를 선도했다. 제1회 사천문화제는 이 수양문화연구회가 주축이 돼 개최했다. 사천문화제는 1966년 제9회 행사까지 이어졌다.

사천문화제는 1987년 10월, 21년만에 부활했다. 이름은 사천수양제로 바꿨고, 군민체육대회를 겸했다. 수양(洙陽)이란 예부터 사천의 다른 이름이었고, 곤양(昆陽)을 포함하는 뜻도 담았다. 앞서 소개한 수양문화연구회와도 이름에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다음은 사천수양제 취지문이다.

“반만년 역사 속에 피어난 우리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국기를 튼튼히 다질 수 있는 체육진흥의 중책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사명임을 절감하여 그 소임을 다하고자 군민의 뜻을 모아 사천문화제와 군민체육대회를 겸한 사천수양제를 개최한다.(…)사천은 신라와 조선조를 통해 조상들께서 다듬고 가꾸어 놓은 찬란한 전통문화가 깊이 뿌리내려 있고 화랑정신의 용맹이 이 고장 발전의 기틀이 되고 있다. 이제 문화예술과 체육진흥을 위해서 지역과 계층, 그리고 세대 간의 격차를 버리고 모두 동참할 때다.”

삼천포지역에선 사천문화제에 자극을 받아 1960년 10월 22~24일, 한국예총 삼천포지부장 손병준이 주축으로 제1회 향토문화제를 열었다. 이후 4년간 쉬었다가 삼천포항이 개항장으로 승격된 1965년에 제2회 향토문화제를 개최했다. 그 이듬해인 1966년엔 명칭을 노산문화제로 바꿔 3회 행사를 가졌고, 다시 1969년에 제4회 노산문화제를 열었다. 1970년 제5회부터는 한려문화제로 이름을 바꿨고 이후 1988년 12회까지 이어갔다. 1989년부터 통합사천시 출범 직전인 1994년까지는 시민한마당큰잔치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가졌다.
삼천포에서 문화운동이 싹튼 것은 8‧15광복 직후 삼천포문화동지회가 창립되고부터다. 당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한글보급운동과 농어민계몽운동을 벌였고, 아동신문 <참새>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이 운동은 김상옥이 주도했는데, 그는 시인 박재삼의 스승이기도 했다. 삼천포문화동지회는 1950년 문총삼천포지부로 개편됐다.

1960년 제1회 향토문화제 개최요강 자료를 보면, 남양 농악대와 어린이 취주악단의 시내 가두행진을 시작으로 사생실기대회와 입상작 전시회, 사진촬영대회, 남녀 신인가요제, 신무용과 고전무용 경연대회, 연극 ‘꽃잎을 먹고사는 기관차’, 실용자전거대회, 여자 그네뛰기대회 등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제1회 향토문화제의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비롯함과 역사의 흐름은, 누리에 문화의 꽃을 피우려는 창조주의 성업이다. 문화의식이 푸짐한 곳에 융성과 영광이 찬연했고 그의 얕고 여린 곳에 쇠멸과 치욕이 드리웠음은 곧 그의 섭리이다. 겨레의 내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윽한 문화의 꽃은 향토문화의 총화로 이룩되거니, 조국에 한 송이 꽃을 피우려는 기원의 합창으로 천년의 헛된 자랑을 부정하며 영겁으로의 알찬 영광을 집약하려는 자부로서 여기 그 제전의 횃불을 밝혀 드는 바이다.”

이상에서 살피건대, 와룡문화제의 전신인 수양제와 한려문화제는 문화예술인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태어났다. 어쩌면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순수 민간차원의 행사다보니 우여곡절도 많았고, 매년 개최도 힘들었다. 후반으로 넘어올수록 차츰 관 주도로 바뀌었고, 체육행사 결합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와룡문화제를 준비하는 사천시나 문화재단, 문화예술단체들은 이 같은 역사를 잘 살필 필요가 있겠다.
 

▲ 제7회 한려문화제 개최 관련 부산일보 기사.(사진=사천문화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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