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Francois Millet·Le Bouquet de marguerites, 1871-74

▲ Jean-Francois Millet·Le Bouquet de marguerites, 1871-74
Gustave Courbet(구스타브 쿠르베)라는 걸출한 화가가 시도했던 사실주의라는 화풍은 당시의 아카데미즘 화풍에 반항하는 것을 핵심이념으로 삼았다. 아카데미즘 화풍이란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학풍으로서 정부에 의해 설립, 비호되고 전통에 의해 지지되는 예술적 유파를 말한다. 쿠르베는 이런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을 위해 돌 깨는 작업이나, 목욕하는 여인 등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을 사생(寫生)하였으며, 저 유명한 《오르낭의 매장(埋葬)》(1850)과 같은 작품으로 사실주의를 주장하였다.

쿠르베와 함께 그 사실주의의 정점에 선 또 다른 작가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Jean-François Millet(쟝프랑소와 밀레)이다. 밀레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농촌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살 때 쉘부르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는 1837년 파리로 유학해 역사화파의 Paul Delaroche(들라로슈)의 제자가 된다. 1849년 파리 교외의 퐁텐블로 숲 속 작은 마을,바르비종으로 거처를 옮긴 밀레는 이후 농민의 고통과 노동의 신성함을 집중적으로 화폭에 옮겼다. '이삭줍기' '만종' 등의 걸작이 이 시기 작품이다.

햇빛 잘 드는 창문 틀 위에 데이지 꽃으로 보이는 환한 꽃다발이 항아리 가득하다. 그 뒤에 한 노파가 수줍은 듯 꽃이 만든 그늘에 숨어 있다. 아니 정확하게 노파인지 아니면 아낙네인지 알 수 없으나 바느질을 하던 중에 꽃 화분을 그리는 화가를 발견하고 그 화분 뒤로 숨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위를 묶어 놓은 긴 끈 밑으로 보이는 밀레의 사인이 창틀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밀레의 그림에서 보이는 인물의 정형성은 대부분 무표정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삶이 그러했으므로 사실적 화풍의 밀레에게 그렇게 묘사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밀레가 본 바르비종 마을 주위의 사람들은 고통과 가난으로 찌든 일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 사실적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다 보니 밀레의 그림은 우울하거나 아니면 처량하고 혹은 지나치게 고요하다. 이 그림도 아낙의 수줍은 표정과 태도로 보아 외지인을 쉽게 보지 못한 농촌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 ‘이삭줍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당시 민중들의 곤고함과 ‘만종’에서 보이는 음울함을 우리는 지난 중고 시절 애써 평화롭고 안정적인 이미지로 오해한 채 오늘에 이르렀음을 반성해야만 한다.

데이지 꽃 가득한 화분을 창틀에 내 놓고 그 뒤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외부를 보는 저 사람의 눈에서 당시 밀레가 그의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 즉 사실에 근거한 회화 정신과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