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지나면서 이탈리아의 독재자들은 콜로세움 곳곳에 박혀있던 쇠붙이를 빼내 그것을 녹여 무기로 쓰는 바람에 콜로세움 외벽은 마치 총이나 포탄을 맞은 것처럼 흉물스런 외관이 되었다.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이전 브누빌의 그림 속 콜로세움은 아름다운 고대의 건축물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콜로세움은 기대만큼 멋진 유적은 아니다. 다만 로마 시내의 랜드 마크라는 점에서 약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Flavium)’이라고 한다. 로마의 융성이 막 시작되었던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글래디에이터(劍鬪士)의 시합과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잔인하지만 고대 로마 시민들에게 원형 경기장은 경기를 보며 로마 시민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끼게 해 주고 황제지배의 위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였다.

장 아쉴 브누빌(Jean-Achille Benouville)은 1815년 파리에서 태어나 1891년 파리에서 죽은 풍경화가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 태생인 그가 가장 많이 그린 풍경은 주로 이탈리아의 풍경이었다. 물론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바르비종파의 성지)숲이나 프랑스 북부의 한적한 산골인 콩피에뉴 풍경도 그의 작품 중에는 많다. 하지만 브누빌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풍경이다.

1837년 로마상에 2등으로 입상한 뒤 세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장 밥티스트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과 그 이후 5년 동안이나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그린 많은 작품을 파리에서 전시하여 당대 풍경화가로서 이름을 높이게 된다.

현재의 팔라티노 언덕은 깨끗하게 단장되어 관광객들이 그 언덕 위에 서서 포로 로마노의 폐허를 관람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1870년 당시의 언덕은 아름다운 자연과 고대 로마의 신비를 아직은 많이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폐허의 성벽으로 난 작은 관문을 통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의 옷차림으로 보아 기독교의 수사 모습인데 흰 머리카락만 보이는 것이 왠지 쓸쓸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풍경을 통해 알 수 있는 브누빌의 예술세계는 객관적 자연으로부터 좀 더 나아가 작가의 관념과 이상이 녹아있는 풍경의 창조에 있다. 그의 이탈리아 풍경 연작에서 대부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고요하고 안정된 풍경을 바탕으로 그 이면에 오랜 옛날 어느 한 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꽤나 달라진(대부분 퇴락한)지금의 풍경으로부터 비롯되는 쓸쓸한 느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그림에서 읽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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