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승면 사천경찰서장
기게스(Gyges)는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목동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반지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남의 눈이 무서워 상상도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기게스는 왕궁으로 들어가 왕비를 유혹해 간통하고, 왕을 살해한 후 자신이 왕이 됐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얘기다. 플라톤은, 그런 반지를 갖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사람은 없으며, 누구든 기회와 능력이 주어지면 부정한 행위를 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인간의 정의로움과 윤리도 외부의 시선이 없다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이라는 국회의원, 군 장성, 판사와 검사, 대학교수와 교장이 뇌물 또는 성 상납을 받거나, 성추행과 성희롱으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우리는 흔히 접할 수 있다.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도덕과 정의를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상대를 무슨 노리개나 착취의 대상쯤으로 여기는 천박한 행태가 예사로 행해진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그 이면의 삶이 다른 이중적인 행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숨겨진 보편적 성향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지킬 박사’의 훌륭한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지만, 이면에는 ‘하이드’의 야수성을 숨기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보이고 싶은 나’와 ‘숨기고 싶은 나’가 서로 삶에서 더 큰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는 얘기다.

굳이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도,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가면을 번갈아 쓰면서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서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던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서는 권위적인 남편이나 아버지로 가면을 바꿔 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 않는가. 살다 보면 더러 가면을 바꿔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그런 때에도 하나의 가면이 요구하는 본질적 역할을 충실히 연기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다. 하지만, 사회지도층의 역할에 ‘뇌물 수수나 성희롱, 성추행’이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권력의 불평등 문제를 제기해본들 해법은 없다. 보통은 감시와 처벌이 이런 문제에 대한 해법이 되겠지만, 그때에도 ‘문지기의 문은 누가 지키나’라는 문제는 남는다.

외부적 감시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고위 공직자나 사회지도층에게는 내면의 수양을 통한 자기 규제가 필요하다. 자신의 인격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숙고를 통해 자신 속의 ‘하이드’를 잘 달래서 잠재우고, ‘지킬 박사’의 활동 시간과 공간을 늘려가는 것이 곧 자기 수양이다. 홀로 있을 때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중용의 ‘군자 신기독야(君子 愼其獨也)’의 의미는 외부 감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고 규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 지도층에게서조차 ‘신독(愼獨)’을 기대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는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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