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라(Georges(-Pierre) Seurat, 1859~1891)가 시도한 표현기법은 신인상주의 회화에서 점묘파란 새로운 流波를 만들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시냑(Paul Victor Jules Signac)이다.

쇠라의 점묘보다는 매우 굵고 두터워진 점묘는 시냑만의 특징으로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키고 정립하게 된다.

파리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폴 시냑은 열일곱 살이었던 1880년에, 조르주 샤르팡티에(Georges Charpentier)의 기획으로 잡지 “라 비 모데르네(근대의 삶)” 사무실에서 열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전시를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84년에 시냑은 심사위원이 없는 미술 전시회인 독립미술가전(살롱 드 앙데팡당)의 창립자 중 하나가 된다.

그들 중 쇠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의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은 시냑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는 아직은 점묘가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쇠라는 이미 분할주의(Divisionism)를 시도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러한 쇠라의 회화적 표현 방법은 시냑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이에 시냑은 쇠라의 친구이자 제자가 되어 서로의 작품에 대해 조언도 주고받았다. 시냑은 쇠라에게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에서 강렬한 색채의 점을 추가해볼 것을 권했고 쇠라는 실제로 그렇게 작품을 수정했다. 1885년에 쇠라는 시냑에게 분할주의를 써볼 것을 권했다. 1886년이 되면 두 화가 모두 후기 인상주의의 독특한 회화적 표현방법인 점묘법(Pointillism)을 사용하게 된다.

이 그림은 파리를 관통하여 흐르는 센 강 위에서(Auf der Seine)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말 그대로 센 강 위에서 배를 타고 본 센 강의 일몰풍경이다. 쇠라의 점묘보다 거칠고 두터운 점묘를 사용하여 후기 인상주의에서 아직은 남아있는 사물의 윤곽이 허물어지고 이제는 사물의 구체적 윤곽에 미련을 버리고 사물에 대한 작가적 재해석이 회화적 표현으로 시도되는 추상미술로 전이되는 전 단계의 미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분할주의를 창시하고 이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만든 것은 쇠라지만, 이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시냑이었다. 그는 1899년 “D’Eugene Delacroix au Néo-Impressionisme(드라크루와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를 통해서 신인상주의를 적극 옹호하고 회화사에서 그 위치를 점유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모네와 인상주의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준 네덜란드의 풍경화가 용킨트(Johann Barthold Jongkind)의 수채화들을 연구하여 1927년에 펴낸 책을 통해 수채화에 대한 탁월한 시각을 보여준 예술 이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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