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해전의 재조명과 성역화 사업을 통하여 관광자원 활성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작년 4월부터 년말까지 8개월간 수행된 「임진왜란 거북선 최초출전지 사천해역 성역화사업 기본계획」용역결과에 대하여 지난해 연말인 12월 5일에 최종보고회가 있었습니다.

이 용역 결과 보고서 내용에서 아주 특별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사천해전이 있었던 곳은 ‘사천선창’ 으로 되어 있고, 임진란을 공부한 역사학자들은 이‘사천선창’이 현재의 용현면 선진리라고 비정(比定)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는 난중일기나 장계 등에 나타난 지명 중 사천선창의 현재 위치를 고증할 수 없고 현재 알 수 있는 지명은 모자랑포라고 하여 이 모자랑포에 대하여만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충무공연구회자문위원, 충무공리더십센터 등의 관련교수 3인의 고증의견서를 첨부하고 있으나 그 3교수들의 고증내용이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은 내용으로 각자의 서명만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천선창이 지금의 어디쯤인지 비정할 수 없는 곳일까요?

굳이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충무공 이순신에 대하여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많은 학자들이 내놓은 임진란 관련서적으로도 선진리가 사천선창이라는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천해전의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자랑포-송포농공단지-모충공원으로 사업대상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업대상지에 배치할 시설계획을 보면 사천해전기념관, 기념제단, 판옥선거북선왜선 전시체험관, 전망대 및 정자, 조각공원, 3D영상관, 해안데크(산책로 및 자전거도로) 등으로 160여억 원의 예산규모입니다.
용역 책임자의 의견대로 토지이용 면에서 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이점(利點) 때문일까요? 실제 사천해전이 있었던 곳에서도 그만한 토지를 물색해보면 어렵지않게 구할 수 있었을 텐데도 굳이 모충공원 쪽으로 사업지를 선택한 사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가시지 않습니다.

사천해전을 마치고 총상을 입은 왼쪽 어깨에서 탄환을 제거하고 치료하면서 하룻밤을 지낸 모자랑포는 정확하게 고증된 지점일까요? 임진란이 끝나고 십여 년이 흐른 뒤에 쓰여진 『진양지』에는 진주목 남면 말문리의 11속방 중에 ‘모자랑포방(茅茨廊浦坊)’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자랑포라고 알고 있는 지점인 남양동 충무마을 앞의 해안은 임진란 무렵에는 월경지(越境地)인 진주땅 모자랑포라고 하여야 맞는 것입니다. 장계에서의 ‘泗川地毛自郞浦’는 많은 학자들이 이미 비정한 용현면 주문리가 맞는다고 봅니다. 용현면 주문리는 사천현 지역의 땅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남양의 역사와 문화이야기』라는 책에서도 대포동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저자가 충무마을 앞의 모자랑포 지명에 대하여는 애매모호하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역사물을 관광자원으로 할 때에는 그 역사의 진실성이 변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事實)이 존재하면서 현대인들의 구미를 더할 수 있는 요소가 가미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거북선 최초출전지 사천해역 성역화 사업 기본계획」의 주사업 장소는 용현면 선진리에서 주문리에 이르는 해안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조영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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