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愛 빠질 만한 이야기-14

▲ 비토섬 입구에서 바라본 서쪽 전경. '바다의 우유'로 불리는 굴 작업이 한창이다.

사천으로 막 이사 왔을 때는 버스 시간표를 달달 외우던 뚜벅이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던 중 어쩌다 폐차급의 똥차가 한 대 생기면서 사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기자기한 풍광에 감탄사를 쏟아내면서 마침내 사천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네요.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랐던 곳 중 하나가 비토섬입니다. 처음에는 섬의 이름에 별주부전의 전설이 숨어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저 노을이 참으로 아름답게 비치는 아름다운 해안일주도로에 감탄했던 거죠. 그 후로는 조용히 드라이브를 해야겠다 싶으면 자연스레 향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 비토섬에 조성된 별주부 테마공원.

비토섬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서포면 비토리 땅끝 바닷가에 토끼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별주부전의 내용과 대동소이한데요, 결말은 조금 다릅니다. 자라의 등을 타고 용궁에서 돌아오던 토끼가 달빛에 반사된 월등도를 보고 성급하게 뛰어내리다 물에 빠져 죽고, 그 자리에 토끼 모양의 토끼섬이 생깁니다. 토끼를 놓친 자라도 용왕님의 낯을 뵐 면목이 없어 안절부절 하다가 죽고 그 자리에 거북섬이 생겨났으며, 아내 토끼가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곳은 목섬이 되었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오래된 구전설화나 전설은 일부 에피소드가 다를 뿐 주요 모티브와 결말은 함께 가져가기 마련인데요, 이상하게도 별주부전의 결말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비토섬에 내려오는 전설도 있고, 화타가 나타나 정성에 감복했다며 용왕의 병을 고칠 약을 준다는 버전도 있습니다. 『한국의 판소리(정병욱 著)』에 수록된 《수궁가(유성준劉聖俊 판, 박초월朴初月 창)》를 보니 토끼가 자라에게 직접 해약의 제조법을 알려주는 대목도 있네요.
부산대 정출헌 한문학과 교수는 위기-극복, 위기-극복으로 이어지는 반복구조와 다양한 결말을 두고 “중세사회의 무제한적 침탈을 겪어야 했던 서민의 혹독한 현실, 그러나 어떻게든 그것을 견뎌내야만 했던 서민의 간절한 염원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별주부전에는 서민들의 실상을 대변하는 그런 골계미가 있었던 거였네요.

문득 박범신 작가의 『토끼와 잠수함』이란 단편도 생각납니다.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병원비를 마련해서 집에 가다가 무단횡단을 했다고 닭장차에 잡혀 들어간 회사원이 주인공인데요, 버스 안에는 주인공 외에도 집에 있는 갓난아기 걱정에 애를 태우는 행상 아주머니와 실업자, 술집 작부 등 다양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찜통 같은 한여름에 창문조차 열지 못하니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말의 편의도 봐주지 않고 버스는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 누구도 제복을 입은 공권력에 맞서지 못해 입을 다물고, 그나마 토끼와 잠수함의 이야기를 하며 창문을 깨고 공권력에 맞선 이는 더벅머리 대학생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제복의 경찰은 구타로 응답을 하는데, 마침내 사람들의 아우성이 극에 달했을 때 버스가 아기를 업은 여인을 치고 급정거를 합니다. 버스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입니다.

이들 모두 유신시대의 폭압에 당한 희생양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국민의 자율성 배제와 통제를 위한 공권력 남용이 당연한, 한 마디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어찌 제정신일 수 있을까요. 창문이라도 깨야 숨 쉴 수 있음에도 버스는 나 몰라라 내달리기만 합니다. 1973년에 출간된 무려 40년 전의 작품이 어쩌면 이리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이 부는 작금과 비슷한지.

곁길로 잠시 샜나 했더니 너무 많이 와버렸네요. 용궁에서 탈출한 토끼는 월등도를 보고 육지인 줄 알고 뛰어내렸다가 고이 수장됐는데, 그럴 법도 합니다. 전남 진도에서는 일 년에 몇 차례 바닷길이 열리는 걸 상품화해서 '신비의 바닷길'로 관광객 몰이를 하고 있는데요, 월등도 또한 썰물 때 바닷길이 열리는 아주 특이한 곳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던 토끼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자라의 등에서 내리고 싶었을 겁니다. 드디어 월등도를 보고 나니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싶고, 썰물에 길이 열렸을 거란 생각에 부리나케 뛰어내렸겠죠. 그것이 패착이 되어버렸네요.

물때를 잘 맞춰 가면 월등도까진 차로도 갈 수 있는데요, 이 길은 아내 토끼가 죽어서 변했다던 목섬까지 이어집니다. 토끼가 죽어서 변한 토끼섬과 자라가 죽은 자리에 있는 거북섬 또한 썰물 때 걸어갈 수 있습니다. 물이 빠진 자리에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 뻘밭의 진정한 멋을 느끼려면 겨울에 찾는 게 가장 좋습니다.

겨울에는 산이든 바다든 모두 삭막한 풍경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겨울여행 때는 설경이 펼쳐진 공간을 찾는데요, 눈도 내리지 않는 남쪽 끝 동네 비토섬은 겨울에 찾아야만 바다의 진미라고 하는 굴을 맛볼 수 있고, 최고의 여행은 식도락여행이라는 말처럼 맛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검은 뻘에서 막 캐어낸 굴을 석쇠에 바로 구워 먹는 그 맛은…… 캬~!! 소주 한 잔이 절로 생각나네요.

▲ 비토섬에서 바라본 월등도(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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